1392년부터 1910년까지 충청북도 진천 지역의 역사. 1413년(태종 13) 행정단위 및 명칭으로서 ‘진천현(鎭川縣)’이 제정되어 오늘날의 ‘진천(鎭川)’이라는 지칭의 기원을 이루었다. 행정직제상으로는 종6품관 수령인 현감이 설치되었으며, 진천현감은 청주진관 소속의 절제도위를 겸하였다. 지리적으로는 한양에서 경기도 죽산을 거쳐 충주와 청주를 잇는 교통로와 경기도 소사를 거쳐 청...
충청북도 진천군의 조선시대 행정구역 명칭. 진천현(鎭川縣)은 조선왕조 건국 이후 1413년(태종 13) 전국적인 지방제도 개편 때 제정되어 조선 말까지 유지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전국적으로 현(縣)을 군(郡)으로 일괄 개칭하면서 폐지되었다. 1413년의 전국적인 지방제도, 즉 군현제 개혁은 고려 후기 이래 무질서하게 승격되었던 지방 행정구역의 읍격(...
조선 전기 세종대왕이 행차하다 유숙하였던 충청북도 진천 지역의 고을 이름. 세종대왕이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청주의 초정(椒井)에 행차하다가 하룻밤을 머물다가 갔다고 하여, 북평(北平)을 성평(聖平)이라고 하였다. 1444년(세종 26)에 세종이 안질을 치료하고자 물이 좋다는 청주 내수의 초정에 행차하기 위하여 서울을 떠났다. 세종은 죽산을 거쳐 진천을 지나다가 진천읍내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진천군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본과 일어난 전쟁. 1592년(선조 25) 음력 4월 13일 일본군의 제1번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산포 침략을 시작으로 1598년(선조 31) 11월 노량해전(露粱海戰)을 끝으로 사실상 종결될 때까지 무려 7년간 한반도를 전화(戰禍)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한 중세 동북아시아 세계의 국제전적 교전이었다. 전쟁의 전개...
조선 후기 및 개항기 충청북도 진천 지역에서 활동한 유교 학파의 하나. 강화학파(江華學派)는 정제두(鄭齊斗) 이후 가학(家學)으로 양명학을 전수해간 일련의 관료 유학자들이며 하곡학파(霞谷學派)라고도 한다. ‘강화학(江華學)’이라는 명칭은 조선 후기 양명학의 정립자인 하곡(霞谷) 정제두가 강화에서 가학으로 학문을 전수했던 것에 착안하여, 후대의 연구자들이 붙인 용어이다. 강화학파는...
1862년 충청도 진천현에서 발생한 농민항쟁. 1861년 7월에 부임한 전임 현감 이호신(李鎬臣)에 의해 과도하게 책정된 결가(結價) 20냥을 축소해 달라는 청원이 1862년 1월에 부임한 신임 현감 김병유(金炳儒)에 의해 거부당하고, 오히려 징수 집행에 들어가자 진천현의 군민들이 항거하여 일으킨 농민항쟁이다. 1862년(철종 13)에 일어난 농민항쟁, 이른바 1862년 농민항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