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3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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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鎭川農民抗爭 |
영어의미역 | Jincheon Peasant Revolt |
이칭/별칭 | 진천민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호수 |
[정의]
1862년 충청도 진천현에서 발생한 농민항쟁.
[개설]
1861년 7월에 부임한 전임 현감 이호신(李鎬臣)에 의해 과도하게 책정된 결가(結價) 20냥을 축소해 달라는 청원이 1862년 1월에 부임한 신임 현감 김병유(金炳儒)에 의해 거부당하고, 오히려 징수 집행에 들어가자 진천현의 군민들이 항거하여 일으킨 농민항쟁이다.
[역사적 배경]
1862년(철종 13)에 일어난 농민항쟁, 이른바 1862년 농민항쟁[임술민란(壬戌民亂)]은 2월 4일에 발발한 경상도 진주목 단성현의 단성농민항쟁을 시작으로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약 70여 군현에서 연이어 발생하였다. 따라서 그 배경은 단지 각 군현 내부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조선 왕조의 대민 지배 체제 전반에 대한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실제로도 당시 농민항쟁의 원인은 이른바 삼정문란(三政紊亂), 즉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으로 지칭된 대민 수취 체제의 모순에서 발생하였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사실 삼정문란이라는 측면은 표면적 현상이었을 뿐이고, 그 이면에는 순조 이후 전개된 세도 정치(勢道政治)에 의한 권력 독점과 관료 기강의 문란 및 부정부패의 말기적 현상이 중앙 권력 및 수령-이향(吏鄕) 세력의 상호 결탁 속에서 구조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것이다.
먼저 당대의 정치적 측면의 배경으로는 세도 정권의 장기간 지속에 따른 관료 기강의 문란과 부정부패의 만연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19세기 이후 외척 세력의 정권 장악을 통해 전개된 세도 정치는 후대로 갈수록 관료 제도의 운용에서 많은 부조리를 낳고 있었다. 소수 가문에 의한 권력 독점에 따라 우선 관료의 등용문인 과거제도가 부정부패로 얼룩졌고, 관리의 임용을 둘러싼 뇌물 수수가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특히, 수령직의 경우 대민 접촉을 직접적으로 담당하는 지위였던 만큼 중앙 권력과 연계되어 그 비리가 집중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뇌물로 얻은 수령 자리인 만큼, 그에 대한 보상으로 해당 군현에서의 각종 세금의 가중 수취와 중간 포탈로 이어졌다. 또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중앙 권력에 대한 지속적인 뇌물 공여가 필수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아갔다.
따라서 중앙 권력과 수령 및 그 실무 보조 기구인 향리·토호 세력, 즉 이향층의 부정부패한 권력 농단의 모순은 각 군현의 수취 현장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세기 각 군현에서 이른바 삼정문란으로 자행된 대민 침탈은 전정·군정·환정의 수취 체계 전반과 연계된 왕조 권력의 구조적 모순이었던 만큼, 대민 수탈이 집중되었던 삼남, 즉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지역에서는 일단의 도화선이 마련되면 연쇄적 반응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을 계기로 삼정을 중심으로 한 각종 세금이 토지, 즉 결(結)을 단위로 부과됨으로써 부세 수탈은 전결세(田結稅)의 문제로 집중되었다. 이른바 도결화(都結化) 현상으로 토지·가호(家戶)·인정(人丁) 등에 부과되던 각종 세액이 전결세로 집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8세기 이래 상품 화폐 경제의 진전에 따라 19세기에 들어서는 그 세액을 미가(米價)로 환산하여 징수하는 결전(結錢)의 방식이 성행함에 따라, 수취 행정의 모순은 현상적으로는 결가의 책정을 둘러싼 대립으로, 관(官)과 민(民)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1862년 5월 중순에 폭발된 진천농민항쟁의 원인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목적]
1862년 2월 경상도 단성농민항쟁을 계기로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삼남 지역을 휩쓸었던 1862년 농민항쟁은 충청도 지역에서는 비교적 늦은 5월에 들어서 발발하기 시작했다. 진천농민항쟁도 5월 중순에 발생했는데 개별 사건으로 중앙 조정에 정식으로 보고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련 자료가 부족하여 구체적인 전개 과정이나 목적 등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충청좌도암행어사 김익현의 보고가 있어서 배경 등을 살펴볼 수 있는데, 그 원인은 앞서 살펴본 1862년 농민항쟁의 경우와 같이 과도한 결가 책정에 대한 분노였다. 따라서 목적 또한 과도한 결가의 축소 조정을 위한 무력 시위였다고 할 수 있다.
[발단]
진천농민항쟁의 발단은 1862년 1월 새로 부임한 현감 김병유가 전임 현감에 의해 과도하게 책정된 결가를 축소해 줄 것을 요구하는 군민들의 청원을 묵살한 채, 조세 수취를 강행하려 하였던 데서 비롯되었다. 즉, 전임 현감의 부당한 조치가 신임 현감에 의해서도 교정될 기미가 없다고 판단한 군민들은 무력을 동원한 실력 행사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측면에서 실질적인 발단은 전임 현감 이호신의 과도한 수취 조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61년(철종 12) 7월 도임한 전임 현감 이호신은 탐학(貪虐)한 인물이었다. 이호신은 부임 이후 각종 공전(公錢)을 가로챘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서리의 가하전(加下錢) 1,700냥을 착복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이호신은 각 면에서 조세 수취를 담당한 서원(書員)들이 1861년 재해를 입어 감면된 세액 515냥을 농민들에게 되돌려주지 않고 착복한 것을 묵인하였다.
이렇듯 수령과 향리 세력에 의해 중간 포탈 형식의 수취 부정이 자행되는 가운데 농민들의 직접적인 원성을 산 것은 결가를 이전보다 과도하게 20냥으로 책정한 일이었다. 따라서 군민들은 결전의 액수를 낮추어 줄 것을 여러 차례 요구하였다. 그러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1862년 1월 이호신은 남평현감으로 옮겨갔고, 그 자리에는 전임 남평현감 김병유가 부임하였다.
이에 따라 군민들은 다시 김병유에게 결가의 재조정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신임 현감 김병유는 군민들의 요구를 묵살한 채, 전임 현감이 책정한 결가의 수취를 단행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뿐이었다. 이에 군민들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무력을 동원하여 부당한 조치를 시정하기 위한 마지막 방법으로 들고 일어났다.
[경과]
신임 현감의 강압적인 조치에 분노한 군민들은 읍내에서 떼를 지어 관아로 몰려가 닥치는 대로 관청의 집기를 부수며 울분을 토로했다. 관아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운 군민들은 뒤이어 읍내로 나가서 민가를 습격하였다. 정황으로 볼 때 일차적으로는 향리들의 집을 공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향리들은 주로 읍내에 모여 살면서 수령의 징세 행정을 직접적으로 담당하는 주체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읍외(邑外)에 분산 거주하고 있던 양반가를 침탈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중세 농업 중심의 경제 구조에서 농민 생산에 대한 잉여 수취, 즉 지대 수취를 둘러싼 또 다른 부당한 주체로서 토호(土豪)적 양반들도 농민들로부터 적지 않게 불만 및 원한을 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천농민항쟁의 일련의 전개 과정은 자료 미비로 구체적인 확인은 어려운 실정이다.
[결과]
진천농민항쟁은 충청좌도암행어사 김익현의 보고로 사태 수습을 위한 조치가 취해졌다. 전임 현감 이호신은 암행어사 김익현의 보고에 따라 결가의 고액 책정과 가하전(加下錢)의 착복죄로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신임 현감 김병유는 즉각 파직되었으며, 1862년 6월 새로이 홍우명(洪祐明)이 현감으로 부임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사태의 수습 과정에서 농민항쟁을 주도한 인물들은 청주병영(淸州兵營) 또는 청주진영(淸州鎭營)에서 파견된 관군에 의해 체포되어 당시의 일반적인 관행에 따라, 주모자의 경우 효수형을 당하는 등 일정한 처벌이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의의와 평가]
1862년 5월에 발생한 진천농민항쟁은 당시 2월부터 12월까지 삼남 지방을 휩쓸었던 1862년 농민항쟁의 연장선상에서 의미를 파악해볼 수 있다. 즉, 그것은 진천이라는 한 군현에 국한된 불만과 원성의 폭발이라기보다 왕조 정부 특히 세도 정권 자체에 대한 하층 민중의 전반적 거부 운동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진천농민항쟁 이전에 1862년 농민항쟁부터 농민들은 중세 왕조 사회의 여러 모순을 집약적으로 폭로했으며, 이들 농민항쟁은 농민이 역사적 실체로서 결집한 최초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당시 농민항쟁을 야기한 직접적 계기이자 현상적인 문제는 국가에 의한 부세 수탈의 폐단이었다. 농민들은 1차적으로는 청원서를 통해 과도한 부세 징수의 해결을 요구하였는데, 구체적으로는 조세량의 과도한 증가와 향리 등의 관속들이 저지르는 부정행위의 시정이었다.
그렇지만 농민들이 무력을 동원한 실력 행사의 과정을 살펴보면, 공격 대상이 관아나 향리가에 대한 습격에 그치지 않고, 무단적인 양반가나 토호 세력에 대한 징최로까지 범위를 넓혀갔던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즉, 양반 사대부 및 토호 부민(土豪富民) 세력에 의한 과도한 고율의 지대 수취 및 고리대 등 각종 사적 수탈, 산림의 사점화(私占化) 등의 무단 지배에 항의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농민항쟁이 단지 왕조의 부당한 수취 행정에 대한 일시적 원성의 표출이라기보다는, 중세 농업적 생산 관계에서 기본 모순이 작용하고 있던 지주와 작인 간의 갈등 구조에 대한 충분한 인식 아래 전개되고 있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저항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런 측면에서 진천농민항쟁의 의미도 19세기 당시 중앙의 왕조 권력 및 세도 권력과 대민 통치 현장의 수령 및 그와 결탁된 중세적 양반 사대부, 토호 부민 세력에 대한 전반적인 거부 운동이라는 반봉건 항쟁으로서 의미를 성취한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진천농민항쟁을 포함한 1862년 농민항쟁은 일반적으로 빈농들이 봉기에 적극 나서고 몰락 양반, 농촌 지식인, 재지 명망가 등이 지도층으로 참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봉기의 전개 과정에서 향회(鄕會)를 조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때의 향회는 기존의 관주도 향회와는 달리 봉기에 참여한 각계각층의 의견을 모으고 투쟁 방향을 협의하는 장으로 활용되어 민회(民會)·이회(里會)·도회(都會)라고 불렀다.
그리고 향회의 결의를 통해 관에 의한 부당한 가중 수취를 폐기시키는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즉, 우선 일단은 연명(連名)으로 청원서를 만들어 관아에 호소하는 등소(等訴) 운동을 전개한 뒤에, 그래도 요구 사항이 관철되지 않으면 무력을 동원한 실력 행사에 돌입하였다. 또한 향회에서는 벌전(罰錢) 징수나 가옥 파괴 등의 공동체적 강제력을 동원하여 농민들의 가담을 독려하고 조직적인 동원을 시도하였다.
나아가서 때로 농민들은 짧은 기간이나마 읍권을 장악하고, 향회를 통해 자신들이 선호하는 인물을 핵심적인 관속(官屬)으로 임명하며, 문제가 된 조세 장부를 열람하는 등 자치적으로 향촌을 지배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저항 및 거부 운동을 통해 농민들은 중앙 정부로부터 ‘삼정이정책’을 강구하게 하는 구체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반면에 농민들은 군현 단위 부정부패의 중심인 수령에 대해서는 국왕이 임명한 신분이라 하여 크게 위해를 가하지 않았던 것도 일반적 현상이었다.
이는 당시 농민들이 왕조 국가 지배 권력의 모순까지는 구조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왕조 정부에 의해 삼정이정책이 기만적으로 폐기되는 데에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즉, 그들의 요구는 이후 대원군 정권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부분적으로 수렴되고, 다시 동학 농민 전쟁의 과정을 거쳐 체제 모순에 대한 인식의 과정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는 미래적 전망이 결여된 항쟁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