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C020301 |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삼덕리 3구 상덕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종호 |
삼덕리는 1구 하덕마을, 2구 옹암마을, 3구 상덕마을, 이렇게 세 개의 자연마을을 통칭하는 행정구역상의 이름이다. 여기서 하덕과 상덕을 지칭하는 덕문이란 이름은, 항상 덕을 쌓고 배움에 끝이 없다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글을 배우고 익히면서 사는 마을이란 뜻이다. 큰 덕(德)자에 글월 문(文)자를 쓰는 덕문이는 마을을 찾아온 손님들이 “아, 이 동네는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구나! 글공부도 참 열심히 하는구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한낮부터 밤중까지 아이들이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마을 사람들이 부지런하고 인심이 후덕하여 살기 좋고 따뜻한 평화로운 마을이란 뜻으로도 덕문이라 불렸다고 한다.
[덕문이에 유일했던 서당 이야기]
이상일 할아버지는 소학교에 입학하기 전 7세 때부터 9세까지 서당에 다녔다. 그 시절 삼덕리에서 서당이 있는 마을은 상덕마을뿐이었다. 그래서 다른 동네에 살던 친구들이 상덕마을까지 와서 서당에 다녔다.
글공부라는 것이 요즘은 의무 교육이지만 1950년대까지만 해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이 서당이나 학교였다. 부모님이 보내 줘야만 갈 수 있고, 형편이 되어야 갈 수 있었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공부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것이다.
이상일 할아버지는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까지 상덕마을에 서당이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실제로 6·25전쟁이 일어난 후에도 잠시 동안 마을 사람들이 서당에 다니며 글공부를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상덕마을 서당은 아마도 전쟁이 일어나면서 시나브로 문을 닫았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효가 곧 덕이고 덕이 곧 효야]
삼덕리 상덕마을에서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이상일 할아버지는, 상덕마을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효 사상’이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상덕마을 사람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서로 공경하고 마을의 대소사가 있을 때 서로 돕고 함께 의논하는 것도 모두 효 사상이 투철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른들을 공경하고 배려하고, 또 부모에게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늘 정 많고 효심이 깊었던 덕문이에서 발생한 효 사상인 것이다. 효라 함은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건강하고, 속된말로 반항하지 않고 엇나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공부를 할 때도 부모님이 고생해서 번 돈으로 학교를 다니면 그만큼 더 열심히 해야 하고, 허투루 나가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할아버지는 그러기 위해서 늘 교훈적인 이야기로 마을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했다.
효는 핏줄의 사랑으로 이어진 윤리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는 핏줄 관계로 끊을 수 없는, 애정으로 굳게 이어진 것이다. 효는 혈연의 도리이며 이는 곧 천륜이다. 이 때문에 자식들만 효를 행하라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자식이라면 아들딸 구분이 없으니 자녀는 부모님의 육체적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효는 보은의 도리로 섬기는 기강이다. 보은(報恩)이란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이고, 기강(紀綱)이란 마땅히 지켜야 할 윤리이다. 효는 공경과 예절로써 받드는 도리이다.
효도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야 한다. 그저 물질로 받든다거나 남의 체면 때문에 할 수 없이 모시는 것은 진정한 효가 아니라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효는 자녀가 지켜 나가야 마땅한 의무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도 어미는 새끼를 사랑하고 새끼는 어미를 따른다. 효는 곧 자녀만이 복종과 희생을 강요하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고 부모의 내리사랑도 곧 효와 이어지는 윤리인 것이다.
이러한 효와 덕으로 이루어진 덕문이는 그래서 늘 풍요롭고 정겨운 마을이 아닐까 싶었다. 실제로 마을에 들어서면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담소를 나누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모습만으로도 훈훈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