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C01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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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삼덕리 1구 하덕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종호 |
[병술년 물난리 대단했어.]
진천은 원래 침수 피해가 없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병술년[1946년]에는 무슨 일인지 장마가 심하게 져서 진천 지역 주민들의 피해가 무척 심했다. 특히 진천읍 삼덕리 주변은 다른 지역에 비해 큰 피해를 입어서 마을 주민들이 집단으로 이주를 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진천읍 중성리와 오감리, 삼덕리 하덕마을의 경우 “물을 퍼부었다”라고 표현할 만큼 많은 비가 왔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그때 내린 비로 삼덕리와 인접해 있는 구곡리의 농다리를 흐르는 미호천과 백곡천, 이월천 물이 합쳐져서 삼덕리까지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휴, 저저기 농다리를 가 봤으니 알겠지. 장마가 비가 많이 온다 이거여. 몇 백 미리가 온다 이거여. 백곡천·이월천까지 합치고, 고속도로에서 합쳐 내려오면 백곡천하고 덕산에서 이월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쳐지면 여간 많아지나. 농다리가 좁아서 채어 올라오는 거여! 채워 올라와 빠지지가 않으니까 올라오는 거여. 그래서 중성리, 오감리 쪽이 물난리여.”
그런데 60년 후인 2006년 삼덕리는 또다시 물난리를 겪었다. 또 병술년이었다. 60년 만에 또다시 닥친 물난리라고 해서 병술년 물난리2라고 부른다.
과거 병술년 물난리1 때는 비로 인해 가옥이 침수되어 전쟁을 피해 피난 가듯 삼덕리 주민들은 간신히 사람만 빠져나와 먹을 것도 없고, 이불이며 옷가지도 없이 피난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덕문이들에서 나온 쌀을 수확하여 모두 저장해 놓은 마을 창고에까지 물이 들어와서 마을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큰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때는 요즘처럼 정부의 보조도 받을 수 없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피해를 복구하고 자립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주변 군부대에서 와서 주먹밥을 해 주어 그것을 챙겨 먹고 죽이라도 끓여 먹고 살면서 장마를 이겨 냈다고 한다.
[하덕마을이 구성되기까지]
1946년 병술년 장마가 있기 전까지는 마을에 커다란 방죽이 있었다는 삼덕리 하덕마을이 지금처럼 가옥이 즐비한 살기 좋은 마을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사연을 듣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해 보았다.
“여가 깊어 가지고 침수가 잘 돼. 피난 가야뎌. 정부에서는 안 되겠다고 해고 저수지[연꽃방죽]를 메어라 하여 저수지를 메어 버렸어. 논을 만들었어. 침수해서 피난 댕기고 어려운 사람들만 골라서 이사를 해라 했지.”
이렇게 방죽이 위치하고 있던 너른 땅을 메워 그 위에 마을을 형성하고 집을 짓고 살 수 있도록 국가에서 허가를 내고 홍수 피해를 입은 주민들을 대상으로 희망자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피해가 커서 희망자가 너무 많이 몰리는 바람에 제비뽑기 추첨을 하게 되었다. 인근 부대에서 뽑기를 주관하여 당선된 사람들만 방죽 메운 자리를 잡고 이사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인 1986년의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덕마을이 형성되기까지 하나의 사건이 더 있었다. 중부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 공사가 한창일 때, 전두환 대통령이 고속도로 현황을 시찰하면서 삼덕리를 지나게 되었다. 너무나도 넓고 아름다운 들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고, “아, 여기 이렇게 좋은 들이 많이 있구나. 동네가 근사하게 있었으면 좋겠다.” 하며 마을을 형성해 볼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침수 지역에 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방죽 자리에 집을 지어 새로 마을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부와 군의 도움을 받아 상습 침수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하덕마을을 형성하고 오순도순 모여 살게 된 것이다.
난데없이 닥친 두 번의 병술년 물난리로 많은 사람이 피해를 겪고 힘든 시기를 보냈다. 하지면 현재는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바로 하덕마을의 심성 고운 사람들이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