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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 장사로 아이들을 다 키워 낸 할머니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B020304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읍 용몽리 시장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서영숙

열일곱 살에 덕산읍 용몽리로 시집을 왔다는 김인숙 할머니를 덕산시장 2구 경로당에서 만났다. 올해 여든 살이 된다는 할머니는 젊은 시절 덕산시장에서 떡 장사를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집살이가 싫어서 도망을 몇 번이나 갔다고]

할머니는 어려서 여자 형제가 없었다. 그러니 친정 부모가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 손에 물 한 방울 묻힐 리가 없다. 노상 밖에서 공기놀이나 하면서 귀하게 자랐다. 그런데 열일곱 살에 용몽리로 시집을 오고 보니, 그 시집살이란 것이 참 대단했다. 9남매나 되는 남편 형제에 시어머니는 또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단다. 공기놀이만 해 봤지 밥을 지어 봤나 죽을 쑤어 봤나, 매사에 손끝이 야물지 못해서 실수만 하니 매일 매일 혼나고 맞는 등 시집살이가 고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시댁을 뛰쳐나와 도망도 여러 번 갔다. 하지만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갈 곳도 없어서 도망가다 잡히기 일쑤였다. 결국에는 체념하고 더 이상 집을 나가지 않았다.

[얼굴에 열꽃 핀 애를 업고 피난을 갔어]

할머니는 스무 살에 큰아이를 낳았다. 그 1년 뒤인 1950년에 6·25전쟁이 발발하여 시댁 식구들과 함께 전부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때 남편은 북한군에 붙잡혀 갔다.

당시 할머니는 첫째를 업고 시댁 식구들과 함께 보은으로 피난을 가는데, 아이가 홍역을 해서 얼굴에 꽃이 피었다. 그때 생각에, 챙겨야 할 시누이랑 시동생들이 많아서 갓난아기를 버릴까도 생각했단다. 그래도 뭐라도 먹이면 좀 나을까 하고 잔반 같은 것을 얻으러 갔다가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를 만났다. 아주머니는, 애가 얼굴에 열꽃이 폈는데 어디를 가냐면서 하루 쉬었다 가라고 밥도 주고 방도 내어주었다. 할머니는 지금도 그 아주머니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면서, 한 번 만나나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20일 정도 피난을 갔다가 용몽리로 돌아왔는데, 북한군에 끌려갔던 남편이 도망을 쳐서 살아 돌아와 있었다.

“어휴. 그때 그 양반이 도망쳐 가지고 남쪽으로 내려왔어요. 근데 글쎄 머리 뒤통수가 피범벅이 되어 있더라니깐. 그래서 그런가 오래 못 살았어요.”

할머니는 그때 생각이 나는지 잠시 얼굴을 찡그린다. 그 후 남편은 대한민국 국군도 해야 된다면서 입대를 했단다.

[돈 버는 재미에 잠도 안 왔지 뭐야]

할아버지가 군대에 가 있을 때 할머니는 어린 시동생들은 물론이며 자식들을 키우려고 삼밭에 가서 품도 팔고 농사짓는 곳에 가서 일도 하면서, 또 시간만 나면 남의 집 식모살이도 했다.

몇 년 후 제대를 하고 나온 할아버지는 농사지을 땅이 없는지라 막일을 하였고, 할머니는 우연찮게 일하던 가게에서 떡 만드는 법을 배워 떡 장사를 시작했다. 그때는 정말이지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고 한다. 할머니의 떡 장사가 잘되자 할아버지가 떡판도 날라 주고 리어카도 끌어 주는 등 할머니의 떡 장사를 돕기도 했는데, 젊어서 머리도 다치고 고생도 많이 해서인지 오래 살지 못하고 60세에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소원대로 그때 떡 장사로 돈을 참 많이 벌어서 자식들도 다 가르치고 시동생들도 다 키웠다. 계를 하여 땅도 한 열 마지기[약 6,611㎡] 샀다. 할머니는 그 후로도 떡 장사도 하고 농사도 지으면서 자식들은 물론이고 시동생, 시누이들을 다 키웠다. 힘들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할머니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힘들었어요. 힘들었지. 젊었을 때 고생을 많이 했다고요. 먹일 입은 많고 입에 떠먹일 건 없고. 그냥 밤낮으로 일해 가지고 돈 벌어서 애들 주린 배는 채워 줘야 되니까요. 하이고 근데 애들이 뭘 압니까? 떡을 팔아 가지고 저들 배를 채워야 되는 것인데 자꾸 집어먹어서 고게 참 얄미웠었죠. 근데 지금은 다 추억이에요.”

당시 할머니는 인절미와 계피떡, 송편 같은 것을 만들어서 팔았는데, 덕산장이 엄청 커서 머리에 떡을 한 가득 이고 장터에 나가면 돈 쌓이는 게 순식간이었단다. 또 밤에는 도토리묵도 팔았다. 그때는 정말 잠을 자는 시간이 아까웠을 정도로 돈을 버는 것이 재미났단다. 도토리묵이야 산에서 주운 도토리를 빻아 만들어 되니까 그것이야말로 노다지였다. 또 메밀묵도 만들어서 파는 등 그야말로 방바닥에 눈 붙이고 잘 시간이 없었다.

하루에 묵이 80판도 나갈 때가 있었다고 하면서, 할머니는 그때 몸 생각을 안 하고 돈만 버느라 지금은 몸이 건강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할머니의 아들딸들은 지금 다 결혼해서 객지에 나가 산다. 젊었을 적 그렇게 고생을 했어도 자식들이 잘 자라서 다들 잘 살고 있고, 명절 때면 시누이와 시동생, 자식, 손자들까지 모이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다고 한다.

[정보제공]

  • •  김인숙(여, 1930년생, 용몽리 시장마을 주민)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10.17 읍 승격에 따른 행정지명 수정 덕산면 -> 덕산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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