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A03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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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구산동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윤정아 |
빠르게 변해 가는 현대 사회와 고달픈 현실에 지친 많은 사람들은 시골을 그리워한다. 시골에 가면 어딘지 모르게 시간이 멈추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구산동마을도 그랬다. 무엇 하나 급할 것이 없다는 충청도 사람 특유의 정서가 배어 있어서인지 모르지만, 구산동마을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느리고 또 여유로웠다. 그 속에서 점점 잊혀 가는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바로 신중희 할아버지다.
[손톱이 무뎌지도록 자리를 멘 할아버지의 정성]
우리가 처음 답사를 나가 할아버지 댁을 방문했을 때 할아버지는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 신기하기도 했고, 도대체 할아버지가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물었더니 자리를 만들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자리는 공장에서 기계로 생산해 내는 것인 줄로만 알았던 우리는, 놀라운 마음으로 자리를 메는 방법에 대해 물어 보았다.
“이게 이게 메는 게 고드렛돌인데, 이걸루다 한올 한올 만드는겨. 이게 고드렛돌. 이걸루다 인저 실을 여기다 감아 가지고 하나씩 하나씩 만드는겨.”
할아버지는 고드렛돌에 실을 감고 자리틀을 이용하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자리를 만든다고 하였다.
할아버지는 주로 왕골자리와 띠자리를 만든다고 했다. 왕골자리는 40날로 속은 짚, 겉은 왕골로 이루어져 있었다. 할아버지는 왕골은 길이가 길어 자리를 메기에 안성맞춤이라고 말해 주었다. 띠자리는 왕골자리보다 좀 더 촘촘한 50날인데, 7월에 강가 주변에 있는 띠를 직접 베어 와서 만든다고 하였다. 띠자리는 제사 자리로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할아버지 댁에서도 제사를 지낼 때 할아버지가 직접 만든 띠자리를 사용한단다.
왕골자리와 띠자리 모두 촘촘하기는 말할 것도 없으며, 손으로 만들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하고 아름다웠다. 자리를 만드는 할아버지의 정성과 땀을 짐작이나 할 수 나 있을까. 오랜 시간 정성을 다하여 자리를 만들어 낸 할아버지의 손톱은 무뎌질 대로 무뎌져 있었다.
[수많은 수상 경력]
우리가 계속 감탄을 하자 할아버지는 조금 쑥스러워하며 서랍에서 상장들을 꺼내 보여 주었다.
“이게 다 상 탄겨, 이게, 많이 탔지, 많이 탔지. 은상, 동상, 특별상. 이건 특별상. 이건 장려상, 그것두 장려상 상장이야.”
할아버지가 직접 만든 자리로 진천문화원에서 주최하는 노인전통공예품 솜씨대회에서 수상한 상들이었는데, 우수상에서 특별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수상 경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이렇게 자리를 멜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 부모님이 만들던 것을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다. 그러면서 할아버지 젊은 시절에는 집집마다 모두 자리를 깔았는데, 진천시장에 내다 팔면 제일 높은 값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게 그 전에는 방바닥에 흙 위에다 까는 자리였어. 지금의 장판 역할이지. 그런데 이 자리가 애들 많은 집에는 이게 5달도 안 가, 그냥 애들 기고 잡아 뜯고 그렇기 때문에, 그래서 이게 떨어지면 그 전에는 애들한테 입히는 것도 없이 빨가벗고 애들 키웠잖아. 빨가벗은 애들이 기어 댕기다 가시에 찔리면 곪아 터지고. 우리 어렸을 때는 그랬어. 우리 집은 자리를 안 사다 쓰고 내가 했고 팔기도 했어, 잘 만든 자리는 좀 비싸고 엉글게 맨든 자리는 싼데, 내 자리는 진천장에 가면 1등자리로 팔았지, 동네에서도 좀 사 가고.”
[눈이 어두워서 이젠 못햐]
할아버지는 이제 더 이상 자리를 만들지 못하게 될 것 같다고 하였다. 그래도 작년까지는 자리를 만들었지만 올해 들어서는 눈도 많이 침침해지고 자식들도 할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그만 만들라고 권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 앞에 심었던 왕골도 올해는 심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가 할아버지의 기술을 배워서 계속 전승해 나갈 수 있는 젊은 사람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배우려고 하는 젊은이들이 없다고 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치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