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A020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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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구산동마을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설 |
멀리서 보면 굴고개를 닮았다고 하여 굴테[일명 굴티]라고도 불리는 구산동마을은 크게 외구마을, 내구마을, 중리마을로 나뉜다. 진천읍에서 동남쪽으로 약 6㎞쯤 떨어진 양천산 연자봉 기슭에 터전을 잡고 있는 구산동마을은 왼쪽으로 미호천을 끼고 있다.
굴테 바깥쪽에 있다고 하여 밖굴테 혹은 바깥굴테라고 불리는 외구마을은 전주최씨의 600년 세거지로, 조선 개국원종공신인 최유경(崔有慶)이 만년에 초평면 화산리 죽정으로 세거한 이후 최유경의 여섯째 아들 최사흥(崔士興)이 외구[밖굴터]로 이주하여 그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현재는 50여 호 정도가 살고 있으며, 이외에도 상산임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세 개의 정려가 있는 마을]
외구마을 역사의 발자취는 은진송씨 열녀문과 최유경·최사흥 부자 효자문, 임수전·임현 부자 충신문의 삼문(三門)으로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세 개의 정려는 마을 사람들의 자부심이자 가장 큰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마을의 자랑거리가 무엇이냐는 우리의 질문에 임준호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말해 준 것도 바로 삼문에 관한 이야기였다.
[은진송씨 열녀문]
삼문 중의 하나인 은진송씨 열녀문은 조선 후기 호조참판을 지낸 임대철의 처 은진송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구곡리에서 사양리로 넘어가는 도로변의 오른쪽 산자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 여인들의 대부분이 그러했듯 은진송씨 역시 남편을 위해 모든 내조를 다하였는데, 그녀의 나이 30세인 1845년(헌종 11) 남편이 사망하자 장례를 치르기 전날 밤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하였다. 당시 암행어사였던 이승수가 이 사실을 알고 충청감사에게 알려서 정부인에 증직하고 열녀문을 세운 것이다.
은진송씨 열녀문은 정면 1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으로, 사면을 홍살로 막았으며, 주위에는 시멘트 담장을 두르고 정면에 출입문을 냈다. 처마 밑에 ‘열녀문(烈女門)’이라는 편액을 달았는데, 내부의 현판에는 “열녀증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상산임대철처증정부인은진송씨지려숭정기원후사신해삼월일명정(烈女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總府副總官常山林大喆妻贈貞夫人恩津宋氏之閭崇禎紀元後四辛亥三月日命旌)”이라고 쓰여 있다.
[열녀문의 의미]
사회의 모든 면이 개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현대에는 조선시대의 여성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여성이 억압당하고 부당한 덕목을 강요당했던 시대가 바로 조선시대이며, 열녀문은 바로 여성 억압의 상징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물론 조선시대 열(烈) 이념과 현대의 개방적 이념 중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열녀 안에 담겨 있는 전통의 의미는 빠르게 변해 가는 현대 사회에서도 생각해 봐야 할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된다. 구산동마을의 열녀문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