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A01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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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구산동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황경수 |
구산동마을을 찾아서 농다리길을 따라가다 보면 문상초등학교를 지나 2㎞ 정도 지점에 외구마을을 알리는 버스정류장이 나타난다. 이 외구버스정류장에서 바라보면 마치 내구, 중리마을로 들어가는 관문처럼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우뚝 솟아 있는 산을 발견할 수 있다. 게다가 여기서부터는 약간의 경사가 있는 오르막길이 시작되기 때문에 외구마을쪽에서는 내구, 중리마을 모습을 볼 수 없다.
언덕을 넘어 내구, 중리마을에 들어서면 구산동을 알리는 자그마한 비석과 함께 전체적으로 원형을 띈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구산동마을은 옛 성터와 같은 유적이 없는 곳이다. 그런데도 사방으로 둘러선 산들이 왠지 성벽을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
농다리 건너 피서대로 향하는 산책로를 따라가다 왼쪽으로 계단을 쭉 따라 올라가면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인 농암정이 나온다. 그리고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산이 두 팔을 벌려서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천연의 요새처럼 안전한 마을]
마을에서 토박이로 80여 년을 살아온 임필수 할아버지를 만나서 마을의 지형과 역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상산임씨 사람들이 1,100년 동안이나 구산동마을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마을의 안전한 지형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마을은 그래도 들어오다 보면 마을이 안 보일 정도로 요새처럼 보여. 그 왜냐면 10대 할아버지가 그때 병부령이었어. 시방으로 말하면 국방장관이지 그 양반이 와서 점령을 해가지구 그 양반이 정치를 했었어, 그 양반이 농다리 놓고 그랬는데, 여기 들어오면 산이 왜 뺑 둘러 있지. 저 길밖에 안 보였었어. 시방도 그렇지만 그 전에는 안 보였어.”
임필수 할아버지의 10대조께서 병부령으로 있을 때, 사방으로 산이 둘러쳐져 있는 구산동마을이 마치 천연의 요새처럼 둘러쳐진 산을 보고 살기에 적당하다고 판단하여 세거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마을에서는 좀체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동학농민운동으로 세상이 한창 시끄러울 때도 구산동마을에는 동학교도 한 명 들어오지 않았고, 덕분에 관군의 시달림도 없었단다.
“동학꾼들이 이 마을에는 들어오지를 못했어. 왜냐하면 구산동이 성 쌓은 것처럼 되어 있잖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침략을 못 했었어.”
마을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이곳 지리를 모르는 외부 사람들은 마을이 있다는 것도 몰랐을 뿐더러, 그 당시는 찾아올래야 쉽게 찾아올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전쟁의 참화(慘禍)도 비켜 간 마을]
그래서 전국 곳곳에 그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는 6·25전쟁 때도 구산동마을이 입은 피해는 다른 곳에 비해 그렇게 크지 않았다고 마을 어른들은 이야기한다.
당시 진천읍에서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마을 아이들은 우르르 마을 뒤편에 있는 망태산에 올라가 전투를 구경했단다. 70대 이상 마을 어른들의 증언에 따르면, 망태산에 오르면 총 쏘는 소리도 들리고 총을 쏘는 불빛도 훤히 보일 정도로 전투 장면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전쟁 당시엔 마을에 농다리란 중요한 통행로가 있었기 때문에 인민군들이 마을에 들어왔지만, 그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없었다고 마을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 먹을 것이 없어 다 함께 고통 받는 처지였지만, 그래도 일부에선 감자나 고구마 등을 삶아서 인민군들과 함께 나눠먹기도 했다는 것이다.
구산동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 나오는 동막골 사람들의 낙천적이며 평화로운 모습이 생각났다. 구산동마을 사람들은 안전한 곳에서 평화롭게 살아왔기에 누구도 두려워하거나 적대시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무서운 전쟁도 낙천적으로 이겨낸 것 같았다. 지금도 여유롭고 조용한 이 마을은, 마을을 든든하게 둘러싼 산들이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평화로움으로 지켜 주고 있는 듯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