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17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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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先史 |
영어의미역 | pre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시대 | 선사/석기,선사/청동기 |
집필자 | 김낙진, 박상일 |
[정의]
문자로 역사를 기록하기 이전부터 청동기시대까지 충청북도 진천 지역의 역사.
[개설]
선사는 문헌 사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시대로서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이른다. 현재 진천 지역에서 구석기 유적은 발견되지 않아서 당시의 구체적인 문화상을 가늠해 볼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신석기시대 유적은 미호천 주변의 초평면 연담리에서 빗살무늬토기편 1점이 발견됨으로써 신석기인이 이곳에 거주하였을 가능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비교적 여러 군데에서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상징인 고인돌 유적이 진천읍 성석리를 비롯하여 10여 곳에서 찾아졌다. 민무늬토기와 유구석부(有溝石斧) 등의 청동기 유물이 수습되었고, 선돌[立石] 등도 확인되었다. 대표적인 고인돌 유적으로는 진천읍 성석리·원덕리, 덕산면 옥동리, 문백면 평산리, 이월면 노원리, 초평면 용정리·용기리·용산리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신석기시대 사람들과 달리 하천 등을 따라 벌어진 평야 주변의 언덕진 곳인 구릉지대에서 살았다. 진천 지역에서 초평면 지역에서 고인돌이 많이 발견된 이유는 미호천 상류 지역으로 구릉지대를 끼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구석기시대]
구석기시대는 뗀석기를 최초로 사용하는 시기를 뜻하며, 석기시대의 초기 단계이다. 가장 초기 단계를 전기 구석기라고 부르며, 호모 사피엔스보다 앞서는 호모 하빌리스와 함께 시작된다. 가장 초기의 석기를 가지고 있으며, 기원전 250만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모 사피엔스는 기원전 20만년 경에 시작되었으며, 중기 구석기에 등장한다. 체계적인 매장 관습과 음악, 초기 예술 그리고 점점 복잡하고 세련된 도구의 사용이 중기 구석기시대의 특징이다. 떠돌아다니며 수렵과 채집을 하는 생활을 했고, 채집 및 수렵 사회는 매우 작은 군락을 이루었다. 풍부한 자원과 발달한 음식 저장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때로는 계층과 계급을 가지고 복잡한 사회구조를 이루며 정주 생활을 하기도 했다. 장거리 교역도 이때 확립되었다.
[중석기시대]
중석기시대는 ‘인간 기술의 개발 단계’이며, 석기시대에서 구석기와 신석기 사이에 해당한다. 중석기는 플라이스토세 말기에 시작되어 기원전 1만년 경이며, 농경의 시작으로 끝이 난다. 이 시기는 지역마다 다르다. 근동과 같은 어떤 지역에서는 플라이스토세 말기에 이미 농경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중석기는 짧고 단지 정의만 할 뿐이다. 제한된 빙하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는 준구석기(Epipaleolithic)라는 용어가 선호되기도 한다.
[신석기시대의 연담리(蓮潭里) 유적]
신석기시대는 간석기를 사용한 시대를 말하며, 원시적인 기술이나 사회적인 발전이 진행된 사회로 석기시대의 끝에 해당하는 단계이다. 1만 2000년 전에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초기 단계의 마을이 발달하고, 농경과 목축·도구의 사용이 발달하였으며, 가장 이른 도기의 제작이 시작된다. 신석기라는 용어는 보통 구대륙에만 사용되며, 아메리카대륙이나 오세아니아대륙은 금속 기술이 개발되지 못했다. 그리고 한반도와 같은 곳의 문화에도 충분히 적용시키기 어렵다.
신석기시대가 되면 사람들은 타제석기뿐만 아니라 숫돌에다 돌을 갈아서 쓰기가 편리한 마제석기를 만들어 쓰게 되었으며, 또 진흙을 빚어 구워서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다. 마제석기와 토기의 출현은 신석기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표적이 되었다. 한국의 신석기시대 유적의 대부분은 빗살무늬토기 유적이며, 이에 따라 신석기문화는 빗살무늬토기 문화라고 불리어 왔다. 빗살무늬토기 유적은 대부분 수변(水邊)에 위치하는 것이 하나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진천 지역의 연담리 유적도 큰 하천을 옆에 끼고 있다. 청주에서 진천으로 가는 17번 국도를 따라 가다 문백면 소재지에 이르기 전 우측으로 청소년야영장 방향으로 4.5㎞정도 가면 초평면 연담리 갈궁저리라는 마을이 있다. 여기에서 신석기시대 대표적인 유물인 빗살무늬토기 파편이 발견되었다. 유적이 위치한 이 마을은 미호천이 크게 휘돌아 나아가는 지점으로 사질토가 발달한 지역이다. 현재는 골재 채취 작업으로 대부분의 유적이 파괴되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빗살무늬토기 파편은 토기의 하단부로 약간 이질적인 형태로 추정되며, 중부 지방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사질성태토(沙質性胎土)의 즐문토기와는 차이가 난다. 대체로 중부 지방 신석기시대 중기 말에서 후기에 해당하는 시기의 유적으로 추정된다.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유적]
청동기시대라는 용어는 인류 문화의 개발 단계에서 발달한 금속이 자리를 잡고, 자연 광물을 채취하여 구리와 주석을 녹이는 기술을 포함하여 이것들을 청동으로 녹이는 기술을 포함한다. 이러한 자연 광물들은 일반적으로 비소를 포함한 불순물이 많다. 기원전 3000년 이전의 서아시아에는 주석이 포함된 청동기가 없다는 사실로 비추어 볼 때 구리와 주석 광물은 귀한 것이었다.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는 민무늬토기와 고인돌을 들 수 있다. 이 시대 유적은 주로 얕은 구릉지대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빗살무늬토기 유적이 물가에 분포하고 있는 점과 대조된다. 청동기인들은 구릉지대에 살면서 농경에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무덤은 고인돌과 석관묘(石棺墓)가 지배적이다. 고인돌은 선돌과 함께 일종의 거석문화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고인돌 군락이 있다. 고인돌은 개인을 위한 무덤으로, 수십 톤에 달하는 돌을 이동하여 만들었다. 따라서 그 속에 묻힌 사람은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고인돌을 축조시킬 수 있는 권력자였다.
이러한 고인돌 유적은 전국적으로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진천이 위치한 충청북도 지방에서도 많은 고인돌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특히 진천 지역에는 진천읍 성석리에서 고인돌이 발견된 이래 원덕리에서 1기, 덕산면 옥동리에서 1기, 문백면 평산리에서 5기, 이월면 노원리에서 4기, 초평면 용정리 생곡에서 1기, 용산리 용대마을에서 3기, 용기리 방죽안에서 7기, 수의·구암·용전마을에서 각 1기씩 발견되었다. 진천 지역에서 고인돌 유적은 특히 초평면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금상 상류인 미호천과 관련이 있다. 초평면 용정리 생곡마을 고인돌 주변에서는 유구석부도 발견되었다. 진천 지역의 고인돌 유적을 보면 청동기시대 이래로 이 지역에 일정한 정치적 집단이 세력을 형성하면서 철기시대를 거쳐 삼국시대로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진천 지역의 선사문화]
진천 지역은 구석기시대 이래로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이루어왔음이 최근의 유적 발굴 조사로 밝혀지고 있다. 진천 지역에서 정식으로 발굴된 구석기시대 유적으로는 진천 장관리 유적과 송두리 유적이 있다. 발굴 조사를 통해 장관리·신정리·송두리·상신리를 잇는 비교적 낮은 구릉지에서 제4기에 형성된 고토양층이 넓게 발달하고 있고, 또한 이들 지역에서 구석기 유물이 수습되고 있으므로 매우 넓은 지역에서 구석기 유적의 존재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신석기 유적은 아직까지 정식 조사된 예가 없다. 그러나 초평면 연담리 갈궁저리마을 강가에서 빗살무늬토기편이 수습되어 차후 신석기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대표 유적인 고인돌은 진천읍 성석리·원덕리, 문백면 평산리, 이월면 노원리 논실, 초평면 용정리 생곡, 초평면 용산리 일대, 초평면 용기리 방축마을 등에서 확인되었다. 민무늬토기를 비롯한 유물 산포지로는 진천읍 문봉리 용소매기, 덕산면 구산리·화산리, 만승면 실원리, 문백면 평산리, 이월면 동성리, 이월면 동성리 자매·노원리 논실·송림리 독지미, 초평면 용정리 생곡·진암리 구정벼루 등이 확인되어 일대에 취락 유적이 분포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진천 사양리 유적과 이월면 신월리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발굴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