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17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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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鎭川監理敎會 |
영어의미역 | Jincheon Methodist Church |
이칭/별칭 | 진천교회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신정리 660[문화3길 7]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정제우 |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신정리에 있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교회.
[개설]
충청북도는 역사적·지리적으로 서울과 삼남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개신교 초창기부터 각 선교부의 선교 거점이 되었다. 1900년을 전후하여 충청북도 지역 특히 청주 지역에는 장로교를 비롯한 감리교·침례교 선교사들의 간헐적 왕래를 통한 순회방식의 전도가 추진되었다.
순회방식의 전도란 결국 도로망을 따른 선교사들의 왕래를 통해 전도가 이루어짐을 말한다. 따라서 서울 송파나루에서 광주-이천-충주의 길과, 노량나루에서 과천-수원-성환-천안의 길로 감리교가 선교의 통로로 개척하여 경기도와 충청도를 선교 지역으로 삼았다.
[설립목적]
진천감리교회는 진천 지역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1899년 경기도 이천에 덕뜰교회를 설립한 감리교회는 덕뜰교회 출신의 박해숙·한창섭·오해주 등을 중심으로 충청도 지역에서 전도 활동을 하였다. 특히 박해숙은 1901년 진천·옥천·충주 등을 다니면서 470여 명의 신도를 교회로 인도한 놀라운 전도 성과를 올렸다.
한편 한강나루에서 용인·죽산을 거쳐 진천·청주에 이르는 길은 북장로교회가 맡았는데 그 결과 1894년 백봉리와 1900년경의 죽산 둔병리에 장로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1901년까지 북장로교회의 선교 활동 범위는 경기도 이남을 넘지 않고 있다.
그리고 1909년 교계 예양협정[Comity Plan]에 따라 감리교는 강원도와 충청북도 북부 지역을 맡게 되었고 장로교는 충청북도 남부 지역을 맡는 것을 골자로 분할 협정이 이루어져졌다. 그 결과 진천 지역은 감리교 선교 구역으로 청주 등의 지역은 장로교 선교 구역으로 확정되었다.
감리교회의 진천 선교의 시작은 1901년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이천 닥뜰교회 출신의 박해숙과 오천교회의 한창섭에 의해 주도된 진천·목천·청주 지역의 활발했던 선교는 1902년 전후 기독교인 사칭 서교인(西敎人)의 범죄와 플리머스형제단[Plymouth Brethren]에 의해 큰 타격을 받으면서도 1907년 청주 지역의 지원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그리고 1909년 앞서 언급한 선교지 분할로 청주가 장로교 선교 지역으로 넘어간 후 진천 지역 선교는 산거리와 산직말을 중심으로 서쪽에 있는 천안 옥천 지역 교회와 직산 지역 교회의 지원을 받았으며 진천감리교회가 창립될 때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다.
1917년 4월 1일 진천읍 읍내리 87번지에서 방홍근·박성노·박시중 등이 신도 100명으로 진천감리교회를 설립하였다. 설립 당시에는 천안 지역에 속해 있었다. 감리사는 윌리암스(Frank Earl Cranston Williams)[우리암]이었고 목사는 천안읍교회 담당 박원백으로 진천읍교회 및 진천 구역의 산파 역할을 했다.
진천 구역은 병천읍·매송·용두리·장산[명]리·산직말[화덕리]·상계리·진천읍교회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1921년 진천감리교회의 부흥에 힘입어 김은태 목사가 진천 구역 담임자로 부임했다. 1923년에는 조종범 목사가 부임하면서 구역회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진천 지역의 감리교회와 성공회의 부흥은 진천 지역의 독립운동과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말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 일제의 무력으로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진천인들은 의병 항일전과 구국 계몽 운동을, 일제강점기에는 3·1운동·문화운동 등 각 분야에 걸쳐서 항일 독립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1919년 3월 15일에 일어난 진천 3·1운동 당시 진천감리교회와 성공회의 전도부인과 여성 교인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만세 운동에 기독교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만세 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에 대해 군민들의 호감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힘입어 진천감리교회가 부흥 성장한 것이며 교회의 성장은 곧 교회 개척으로 이어져 1924년 성석리교회를 설립하였다.
3·1운동 이 후 일시적 부흥을 이루었던 교회는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교회 내에 여러 가지 갈등 양상도 수반하게 되었다. 초기 신앙의 특징 중 하나는 교육에 대한 열정이다. 그리하여 ‘야학’이 실시되어 성인 특히 여성 신자들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교육 기관이 되었다. 이후 학교는‘성성학교’ 또는 ‘명신학원’이 되었다.
전환기[1925~1937]를 맞은 진천감리교회는 진흥 운동을 통하여 교인과 교회 자체가 감리교에서 탈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혹독한 진통을 겪었다. 그렇지만 진흥 방침은 1930년대 들어서면서 효력을 발휘했다. 곧 진천 구역의 교회를 통폐합시키고 진천읍과 장산리 그리고 상계리교회에 선교 역량을 집중시킴으로써 도약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와 같이 갈등을 해소한 진천감리교회는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방훈 목사가 부임하면서 부흥회를 개최하고 진천기독교청년회를 활성화 시키면서 그 산하에 소년부를 조직하는 등 교회의 부흥을 이끌었다.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1930년대에 들어와서 더욱 악랄한 파시즘 정책과 민족 말살 정책을 강제하였다.
수탈 체제의 강행은 물론 신앙 운동과 문화생활의 통제도 강행했다. 더욱이 교회는 신사 참배라는 신앙 문제도 있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교회를 지키는 신앙은 대단히 높이 평가될 수 있고 이들의 헌신이 교회의 위기를 극복하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미국 등 국제적 공황으로 선교사의 지원비가 대폭 삭감되었고 이어서 1940년 선교사들의 추방과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지원금 자체가 끊어졌을 뿐 아니라 교회에 인적 물적 지원까지 강요하였다. 이러한 형편에서 진천감리교회는 오히려 스스로 자립 방안을 세우고 실천했으며 한 걸음 더 나가 1937년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했다.
일제는 모든 개신교를 친일 교단으로 변질시키면서 종교적 민족 독립 운동을 이절 엄금 탄압하였다. 그리하여 감리교도 기독감리단·일본기독교조선감시단 등 통합 교단이 조직 재편함으로써 일제에 협력하였다. 감리교 선교부의 재산도 일제에 몰수됐다.
그러나 진천감리교회는 홍여준 목사[1935~1941]가 담임을 맡아 교회의 친일화를 막는데 힘썼으며 이후 김형태[1941~1943]·이성주 목사[1943], 장필성 목사[1945~1950]등이 끊임없이 파송되었고 소수의 교인들이 교회에 남아 교회를 지켰다.
광복 후 감리교단은 정상적인 구조를 갖지 못했다. 친일 행적 청산과 교권 분열이라는 갈등이 6·25전쟁 직전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진천감리교회도 광복 후 1949년 4월까지 지방회나 구역회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다가 1950년 1월에서부터 정상화가 됐으나 곧 바로 6·25전쟁이 발발하여 교회의 조직은 다시 붕괴되고 휴전이 시작된 1953년부터 다시 정상을 찾게 되었다.
전쟁 후 상처를 싸매주고 치유할 곳을 찾던 사람들은 그 안식처로 교회를 찾게 되었고 또한 전쟁으로 남한으로 피난 온 많은 사람들이 진천감리교회에 등록하면서 일시적인 부흥을 이루었으나 휴전이 되자 다수가 귀향했고 일부 신자들이 1954년 진천중앙장로교를 설립함으로써 교회가 급속히 쇠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 철저한 자급 운동과 신앙 운동을 통해 교회가 부흥되었으며 1952년경 덕산교회가 개척되었고 사석 선교가 대 부흥을 전개하고, 그리고 1955년에는 이월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리하여 전쟁의 참화를 극복하면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진천감리교회는 인격과 지성, 문화와 예술, 창조와 조화 등에서 지역 사회에 헌신에 앞서 있었던 것이다.
1959년 10월 10일에는 세 번째 성전을 건축하였으며 1979년 1월 4일에는 진천제일교회가 개척되었다. 1982년 12월 25일에는 2층 현대식 양옥으로 된 네 번째 성전을 건축했다. 성장 추세에 있던 진천감리교회는 전도사 그리고 목사직을 담임했던 임창문 목사[1963~1979]가 임원들 다수와 청년 등 20여 명과 함께 교회를 떠나 진천제일감리교회를 설립한 것이다. 충격을 받은 진천감리교회는 1979년 3월에 김정욱 목사가 부임하면서 사태를 수습해 갔고 진천제일감리교회도 뿌리를 내리고 지역의 선교를 담당하는 교회가 되었다.
진천감리교회는 1980~1990년대에 꾸준한 성장을 이어갔다. 그 결과 제21대 지기오 목사는 진천 지역이 하나의 독립 지방으로 조직되어 1990년 3월 27일 진천 지방 초대 감리사로 취임했다. 이 부흥을 기초로 최선홍 목사와 교인들은 신정리에 새 부지를 매입하고 2001년 11월 28일 성전을 건축하여 입당 예배를 보았다.
[주요사업과 업무]
전도 사업, 구제 사업, 자원 봉사 사업, 선교사 후원 사업 등과 관련된 사업과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활동사항]
2007년 4월 선교 106년, 진천감리교회 창립 90주년을 맞이하여 『진천교회 90년사』를 출간하였다.
[현황]
2010년 현재 제23대 이찬우 담임 목사를 비롯하여 원로장로 2명, 사무장로 5명, 교육전도사 1명, 간사 1명, 권사 92명, 집사 92명, 신천 집사 8명, 신천 권사 11명, 전입 집사 5명, 전입 권사 2명, 전입 장로 1명 등의 임원과 427명의 교인이 활동하고 있다. 그 외 분과위원으로는 기획·선교·교육·사회·봉사·건축·관리·재정·감사·성가대·필그림선교단·교회학교 그리고 각 기관 선교[남·여·장년·청장년]위원, 26속장과 성찬·차량위원 그리고 선교 산악·선교 족구 등의 동호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