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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815
한자 李相稷
이칭/별칭 순유(舜有),민정(民庭)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381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제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381 지도보기
성별
생년 1878년 3월 29일연표보기
몰년 1947년 8월 18일연표보기
본관 경주
대표경력 문명학교 설립자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자는 순유(舜有) 또는 민정(民庭). 1878년(고종 15) 3월 29일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38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이상직(李相稷)[1878~1947]은 백부 이용우(李用雨)의 손에서 자라다가 이교중(李敎重)에게 입양되었고, 이상설(李相卨) 또한 이용우에게 입양된 관계로 그는 이상설을 종형이라 부르면서 숙식과 수학을 같이하고 추종하였다. 그는 이상설을 통해 세계 정세와 국내 정세의 난맥상을 파악하고, 기울어가는 국권을 바로 잡아보고자 노심초사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의 종결과 을사늑약 등 국망의 위기를 보고 낙향하여 근대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국권회복의 계몽운동을 폈고, 국망 후 일제강점기에는 3·1만세운동을 벌였다.

[활동사항]

1905년 10월 28일 사재를 털어 진천군에 문명학교(文明學校)를 세우고 신학문인 국어·산수·지리·역사·법학·체조·창가 등을 교육하였다. 이는 진천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한일병합 이후 일제는 사립학교가 배일사상을 교육한다고 탄압하다가 모두 폐쇄시켜, 문명학교는 진천공립보통학교로 바뀌어 개교하였다. 진천공립보통학교는 상산초등학교로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3월 14일 저녁 진천읍 자택 객실에서 각 리·동 대표 수십 명과 함께 다음 날로 계획된 독립만세운동에 대해 최종적으로 검토하였다. 그러나 이때 일제 헌병보조원이 밀의하는 객실 마루 밑에 잠복하여 계획의 전말을 모두 엿듣고 진천 헌병대에 고발하여, 다음날 새벽에 그와 동료 몇 명이 검거되어 만세 시위 계획은 좌절되는 듯하였다. 그렇지만 예수교[성공회·진천감리교회]의 전도부인들과 천도교인이 15일 낮부터 은밀히 각 마을을 순회하면서 만세 시위운동 계획을 알리고, 각 마을 단위로 앞뒤 산에서 횃불을 놓고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도록 계몽하였다.

그리하여 15일 저녁 진천면[군청 소재지]과 그 주변의 걸미산·돌고개·고당산·문안산·봉화산 각 산마루에서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씩 분산하여 횃불을 들고 봉화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였다. 이상직은 며칠 뒤에 조중우(趙重愚)[매국노 7적 조중응의 종제]의 교섭으로 석방된 후에 광혜원의 윤병한(尹炳漢) 등과 재차 극비리에 거사 계획을 마련하고 이를 각 동지들에게 연락하여 온 군민이 일제히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4월 2일 오전 8시 이상직은 제2차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동해, 진천면 내에서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벌였다. 시위행렬이 헌병대 앞을 통과하려 할 때 야만적인 일제 헌병대가 시위행렬에 무차별 발포하여 1명의 순국자와 수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군중은 더욱 기세를 높여 맨손으로 헌병대를 공격하여 헌병대 건물과 기물을 파괴한 뒤에 자진 해산하였다.

1925년에는 미국 하와이에서 열리는 범태평양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였다. 그는 수차례의 심한 고문으로 뇌신경에 이상이 생겨 입원 가료하였으나 오랫동안 고생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이상직의 공적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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