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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321
한자 萬弩郡
이칭/별칭 흑양군,황양군,수지,신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
집필자 김영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신라시대

[정의]

신라 때 충청북도 진천 지역에 설치된 행정 구역.

[관련기록]

만노군(萬弩郡)이라는 지명은 『삼국사기(三國史記)』「김유신열전(金庾信列傳)」에 처음 나타난다. 진평왕김서현(金舒玄)을 고구려와의 접경 지역인 만노군 태수로 파견하였는데 여기서 김유신(金庾信)이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高麗史)』「지리지(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및 『여지도서(輿地圖書)』「충청도(忠淸道) 진천현(鎭川縣)」 조에는 만노군은 고구려의 금물노군(今勿奴郡)으로 수지(首知), 신지(新知)라고도 하며 경덕왕 때에 흑양군(黑壤郡)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기록이 있다.

[내용]

만노군은 고구려의 금물노군을 차지한 신라가 명칭을 바꿔 부르던 지명이다. 만노군이라는 지명은 신라 진평왕 때인 594년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이 태수로 부임한 곳이고, 어머니인 만명(萬明)김서현과 야합해 595년에 김유신을 낳았다는 기록에서 처음 보인다. 신라는 6세기 중엽 이후에 고구려의 영토였던 금물노군을 차지하였고, 가야의 왕족으로 신라에 투항한 김서현을 이곳에 보내 고구려 세력을 막게 하였다. 이때 금물노군이라는 고구려의 지명 대신에 만노군이라는 지명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만노군이라는 지명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데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북쪽에 솟아 있는 만뢰산(萬賴山)[612m]이 바로 그것이다. 신라는 금물노군을 점령하여 고구려를 진천 북쪽의 경기도 안성 방면으로 밀어낸 후 험준한 만뢰산에 통치의 거점이자 전진 기지를 설치하고 국경 지역을 다스렸던 것으로 보인다.

만노(萬弩)는 수지(首知) 또는 신지(新知)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이는 ‘만(萬)’과 ‘수(首)’, ‘노(弩)’와 ‘지(知)’의 글씨 모양이 엇비슷한 까닭에 후대에 ‘만노’를 한자로 옮겨 적으면서 ‘수지’ 또는 ‘신지’로 잘못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변천]

만노군은 원래 고구려의 금물노군이었다. 그러나 6세기 중엽 이후에 신라의 영역이 되면서 만노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인 757년(경덕왕 16)에 다시 흑양군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고려 초기에는 강주(絳州)로 개칭하였다.

[의의와 평가]

만노군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이 태수로 부임해 통치하던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 지역이며 김유신이 태어난 곳이다. 신라는 만노군을 차지함으로써 고구려군의 남하를 막아낼 수 있는 요충지를 확보할 수 있었고, 경기도 남부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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