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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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는 언제 어디서 기원하였는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 만큼 다리는 인간의 삶에서 매우 필요하고 자연스러운 요소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이고 진보된 기술로 짜임새 있게 다리를 만들기 시작한 때는 삼국시대이다. 이전의 다리는 정착 생활을 시작하면서 불편함을 덜기 위해 통나무를 걸치거나 주변의 돌을 띄엄띄엄 놓아 빠지지 않고 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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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의 건물, 구조물 등을 쌓아 만드는 일 또는 사람이나 물품 등을 수용하기 위한 구축물. 인간이 태어나서 평생을 머물다 마지막에 임하는 행위 모두가 건축물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인간 대부분은 평생을 낮에는 사무실에서 밤에는 주택에서 머문다. 이 모든 곳이 건축물이다. 예부터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 불리는 진천은 충청북도 중부에 자리 잡고 있다. 고구려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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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알지를 시조로 하고, 김자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진천군 세거 성씨. 경주김씨(慶州金氏)는 김영유(金永孺)의 손자인 김자(金磁)가 진천군 문백면 장월리 월호마을에 입향한 이래 400여 년 동안 세거하고 있다. 경주김씨는 대보공 김알지(金閼智)[65~?]의 후예를 총망라한 신라김씨의 대종으로 그 파계가 매우 복잡하여 전모를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은열공파(殷說公派)·영분공파(永芬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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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광을 시조로 하고, 김약시와 김종길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진천군 세거 성씨.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시조 김흥광(金興光)은 통일신라시대 말 무진주(武珍州) 서일동(西一洞)으로 낙향한 이래 후손들이 번창하여 광산(光山)을 본관으로 삼았다. 광산김씨는 고려조에서 8대 평장사(平章事)를 배출하고, 조선시대에서도 왕비 1명, 상신 5명, 대제학 7명, 청백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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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를 시조로 하고, 김우혁·김우광 형제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진천군 세거 성씨. 김해김씨(金海金氏)는 가락계 김씨(金氏)의 종통(宗統)으로 가락국의 개조(開祖)인 김수로왕(金首露王)을 시조로 하고 있다. 이후 김해김씨의 파계는 김유신(金庾信)을 중시조로 하여 대소 146파로 분파되었는데, 그 중 김유신의 직계 종파는 고려시대 김목경(金牧卿)을 중조로 하는 김녕군파(金寧君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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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간행된 충청북도 진천군의 향토지. 진천문화원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진천군의 전통을 보전하고 발전시키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역의 정서와 특성을 살려 새로운 것을 창출해 내고자 하는 목적에서 1982년 『내고장전통가꾸기』를 발간하였다. 이 책을 편찬한 가장 큰 목적은 많은 사람들이 생거진천의 문화와 전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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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구산동마을에 가면, 농다리로 가기 전에 꼭 한 번 들러야 하는 곳이 있다. 농다리와 함께 구곡리 구산동마을의 또 하나의 명소가 된 농다리전시관이 바로 그곳이다. 많은 관광객의 사랑을 받고 있는 농다리전시관은 구산동마을의 자랑거리인 농다리를 보존하고 후세에 물려주고자 설립된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느티나무 혹은 구산정에 삼삼오오 옹기종기 모여 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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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 양천산(凉泉山)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1932년에 간행된 『상산지(常山誌)』에 대운사 터를 고려시대 절이 있던 곳으로 추정하면서, 작은 암자와 목불, 그리고 석불이 남아 있는데, 이것들을 사람들이 수신과 기복의 목적으로 서로 보호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37년 간행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폐사된 사실은 기록하지 않고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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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원덕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사찰. 대흥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가 폐쇄된 후 중창되었는데, 『상산지(常山誌)』 신편에 따르면 찬의 조중우가 충청북도 진천으로 내려와 머물렀을 때 절을 건축하여 영은사로 일컫고 승도 수인을 두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광무 11년, 즉 1907년(순종 1)조창호가 중건하였다고 하는데 그 관계는 알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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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고속도로 진천 나들목을 통과해 바로 만나게 되는 국도 21호선에서 좌회전을 하면 진천군이 나온다. 진천 읍내 못 미쳐 있는 사거리에서 직진을 하다가 진천 읍내로 들어가 삼거리에서 직진한 후 문백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계속 달리게 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길다고 알려진 농다리를 만나게 된다. 농다리는 진천 읍내를 관통하는 백사천과 이월면을 적시는 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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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중산리 돌여울마을에서 명관 이범조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명관 이범조 이야기」는 간부와 짜고 본부를 모살한 살인 사건을 명관 이범조가 기지로 해결하였다는 공안담이다. 1982년 진천문화원에서 출간한 『내 고장 전통 가꾸기』와 1994년 진천군지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한 『진천군지』에 수록되어 있다. 진천현감 이범조가 민정 시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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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문봉리와 사석리 문안산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 문안산(文案山)[420m]은 사방의 전망이 대단히 좋은 전략적 요충지로, 문안산성(文案山城)은 삼국시대에 이미 축조되어 주로 진천의 남쪽 방면을 방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국도 17호선을 따라 진천군으로 진입하다 보면 진천읍 문봉리와 사석리 사이의 속칭 ‘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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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지역 출신의 의사(義士). 본관은 여흥(驪興). 영의정을 역임한 여흥부원군 묵헌공 민청(閔清)의 14세손이다. 민진동(閔鎭東)[1660~?]은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출전하여 공을 세웠다. 영조의 즉위를 두고 소론을 중심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반란을 모의하자, 영조가 반란 모의 세력을 색출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에 이인좌 등이 17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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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시루봉에 있는 초기국가시대에서 일제강점기 절터. 백련암 터는 본디 길상사의 옛터로서, 일제강점기 백련암(白蓮庵)이란 작은 암자가 들어섰다가 이 암자도 없어지면서 빈터로 남게 된 것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각종 지리지에는 길상사가 태령산(胎靈山)에 있는 사찰로 기록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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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어은마을에 있는 연일정씨 세거지. 문백면은 조선 말기 문방면(文方面) 지역으로 22개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백락면(白洛面)의 15개리, 덕문면(德文面)의 차상리, 청안군 서면의 소백암리를 병합하고 문방의 ‘문’자와 백락의 ‘백’자를 따서 문백면이라 하였다. 봉죽리는 백락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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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원덕리와 사석리 사이 봉화산 정상에 있는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 봉수 터. 봉화산 봉수는 남쪽의 청주 것대산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의 음성 망이산 봉수로 연락을 취하던 간봉으로, 서쪽에는 문안산성(文案山城)이 있고 북쪽으로는 도당산성(都堂山城)이 있어 전략상 요충지에 세워진 봉수대였다. 『상산지(常山誌)』에 1731년(영조 7) 이인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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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영수사 영산회괘불탱(鎭川 靈水寺 靈山會掛佛幀)」은 본래 진천읍 상계리에 있던 백련암(白蓮庵)에서 1653년(효종 4)에 제작되었다가 백련암이 폐사되면서 지금의 영수사로 옮겨 왔다. 초파일 등의 중요한 행사 때 절 마당에 걸어 두고 많은 신도들이 한꺼번에 예불할 수 있도록 사용한다. 진천 지역 유일한 조선시대의 괘불탱으로 삼베에 채색으로 그렸으며 길이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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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상산고적회에서 간행한 충청북도 진천의 향토지. 『상산인맥지(常山人脈誌)』는 그동안 진천 지역에서 발간된 향토지인 『상산지(常山誌)』나 『진천군지』 등에서는 인물편의 내용이 다소 미흡한 점이 있어, 이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진천군청 문화체육과에 소장되어 있다. 『상산인맥지』는 1권 1책이며 국한문 혼용체로 분량은 323쪽이다. 첫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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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에서 생산되는 벼루. 벼룻돌은 함경북도 종성석, 평안북도 위원의 위원석, 평양 근처 대동강 변의 대동강석, 황해도 장산곶의 해주석, 충청남도 보령의 남포석, 충청북도 진천의 상산자석 등이 유명하다. 상산자석은 진천의 옛 지명인 상산에서 나는 붉은 돌이라는 뜻이다. 충청북도에서는 상산자석벼루 외에도 영춘공예특선단지의 단양자석벼루가 있는데, 특히 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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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상산고적회에서 간행한 충청북도 진천의 향토사를 기록한 책. 『상산지(常山誌)』가 처음 발간된 것은 1825년(순조 25)에 정재경에 의해서이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6년과 1932년, 총 2회에 걸쳐 『상산지』가 발간되었다. 이는 예로부터 소중한 문화유산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진천군의 향토사를 기록한 것으로, 지역의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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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에 있는 전통 테마마을. 진천 지방은 옛날부터 평야가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산물이 풍성하고, 한해(旱害)와 수해가 별로 없어 농업 경영이 순조로워 사람들의 인심이 좋고 살 만한 곳이기에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 하였고, 용인은 산세가 순후(醇厚)하여 사대부가(士大夫家)의 묘소가 많기에 사거용인(死去龍仁)이라 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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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거진천쌀은 맛이 좋고 품질이 우수하여 전국적으로도 유명하다. 생거진천쌀이 이렇게 유명해진 데는 진천군 진천읍이 벼농사에 적합한 자연 환경을 제대로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차령산맥에 둘러싸인 중부 내륙의 분지에 위치해 햇볕이 좋고, 밤낮의 일교차가 커서 더욱 품질을 높여 주고 있다. 또한 진천 지역의 50% 정도가 해발 200m 이하의 구릉지로서 자연 재해가 드물다는 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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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문신. 본관은 진천(鎭川). 진천송씨의 시조인 상산백(常山伯) 송인의 8세손이다. 아버지는 송광도(宋匡度)이다. 아들로 송석동(宋石同), 손자로 송일창(宋日昌)과 송일녕(宋日寧)·송일안(宋日安)을 두었다. 송저(宋儲)[?~1445]는 문과에 급제하고 1417년(태종 17) 홍천현감이 되었다가 1422년(세종 4)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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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문신. 본관은 진천(鎭川). 할아버지는 송응국(宋應國)이고, 아버지는 군수를 역임한 송원(宋瑗)이다. 아들로 송하년(宋河年)을 두었다. 송주빈(宋周賓)[1551~1592]은 1583년(선조 16) 계미년 별시 병과에 10위로 급제하여 벼슬이 호조좌랑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포로로 잡혀 항복을 강요받았으나 끝까지 이를 거부하자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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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군에서 생산되는 생거진천 지역의 50% 정도가 해발 200m 이하의 구릉지로서 자연재해가 드물다는 점도 생거진천 쌀의 품질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여건이 되고 있다. 금강(錦江)의 상류인 미호천(美湖川), 그 지류인 회죽천(會竹川), 백곡천(栢谷川), 초평천(草坪川)을 끼고 발달한 비옥한 평야 지역에서는 특히 맑고 깨끗한 저수지와 지하수를 농업용수로 공급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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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칭도를 시조로 하는 충청북도 진천군 세거성씨. 여흥민씨(驪興閔氏)의 시조 민칭도(閔稱道)는 공자의 10제자 중 한 사람인 민손(閔損)의 후손으로, 고려 중엽에 사신으로 왔다가 귀화하여 여흥(驪興)에 정착하여 민씨의 시조가 되었다. 고려 인종 때 민칭도의 증손 민영모(閔令謨)는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태자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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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비선골마을의 만뢰산(萬賴山) 남쪽 기슭에 있다. 지금은 보탑사(寶塔寺)가 들어섰다. 연곡리 절터에 대한 고문헌 기록이 없고, 비문이 전혀 새겨지지 않은 고려 전기의 석비인 보물 제404호 진천 연곡리 석비(鎭川蓮谷里石碑)가 남아 있어 일찍부터 눈길을 끈 곳이다. 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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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백호를 시조로 하는 충청북도 진천군 세거 성씨. 연일정씨(延日鄭氏)는 영일정씨(迎日鄭氏) 혹은 오천정씨(烏川鄭氏)라고도 한다. 영일은 경상북도 포항시의 동해안 일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고려 초에는 연일이라 불렸다. 지금은 각각 포항시 연일읍과 오천읍이며, 본관을 각각 연일·영일·오천으로 쓰고 있다. 2000년 현재 연일정씨 21만 6,510명, 영일정씨 1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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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사찰. 영수사는 918년(태조 1년)에 증통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나 확실한 문헌 기록이 없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절 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조선 말기인 1871년(고종 8)에 간행된 『호서읍지(湖西邑誌)』에 처음으로 기록이 나타나는데 간단히 위치만 소개되어 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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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옥성리 절터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 옥산마을에서 북쪽으로 약 700m 지점에 있는 골재 채취 공장 맞은편에 위치한다. 옥성리 절터의 주변이 모두 논으로 경작되고 있어 유구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절터에 대한 조선시대 이전의 문헌 기록은 없으나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상산지(常山誌)』에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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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신정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의 말사. 용화사(龍華寺)는 속칭 ‘걸미산 미륵당’이라 불린다. 용화사(龍華寺)는 1959년에 비구니 한자심이 신축한 절이다. 본래 고려시대의 절터로서 현재 거대한 석조미륵불입상이 남아 있다. 주변에서 석조여래입상이 발견되어 진천문화원으로 이전하였다가 최근 다시 경내로 이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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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양숙(養叔), 호는 물재(勿齋). 현감 유헌민(柳獻民)의 6세손이다. 유득배(柳得培)는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특히 『소학(小學)』의 강론에 힘썼다. 덕성이 중후하고 문장이 뛰어나 고을에서 이름이 났다. 향공(鄕貢)으로 천거되었으나, 요절하여 고을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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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자화(子和), 호는 물기재(勿欺齋). 아버지는 유심원(柳心源)이다. 유수응(柳秀應)은 1864년(고종 1) 증광진사시에 3등 98위로 입격하였으며, 수직으로 동지(同知)에 올랐다. 전심으로 경학을 연구하였으며, 유고(遺稿)가 있다고 전해진다. 『상산지(常山誌)』에 관련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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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이자 유학자. 본관은 문화(文化). 현감 유헌민(柳獻民)의 8세손이다. 유심원(柳心源)은 어려서부터 품행이 어른스러웠는데, 일찍이 15세 때부터 부모님께 어른으로서 하는 효도를 행했다. 할머니가 70세가 되어 괴질을 앓았는데 의원이 뱀을 잡아먹는 메기를 먹어야 한다고 하자, 그물을 들고나가 냇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메기 한 마리를 잡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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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진주군(晋州君) 유번지(柳藩之)의 후손이다. 유환익(柳煥益)은 집안이 곤궁하여 낮에는 품팔이를 하고 밤에는 집안일을 하며 부모 공양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병환이 나서 혼자 거동할 수 없게 되자, 어머니를 부축하여 일으키고 음식을 직접 떠서 드시게 하였다. 병수발을 든 지 십여 년이 지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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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군보를 시조로 하는 충청북도 진천군 세거성씨. 의령남씨(宜寧南氏)는 755년(경덕왕 14)에 안렴사(按廉使)로 일본에 다녀오다 풍랑을 만나 신라에 표류했던 중국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 사람 김충(金忠)이 신라에 정착하면서 비롯되었다. 경덕왕이 김충에게 남씨를 사성하고 영양현(英陽縣)을 식읍으로 내리자, 김충은 남민(南敏)으로 개명하였다. 남민의 7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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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출신의 조선 후기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중휘(仲輝), 호는 파서(琶西) 또는 구학(臞鶴)이다. 좌의정 이경억(李慶億)의 5대손이고 조부는 이석로(李錫老)이며, 감역 이진원(李進源)의 아들이고 부인은 권세모(權世模)의 딸이다.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태어나 거주하였다. 1774년[영조 50] 식년시를 통해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별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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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진천(鎭川). 또는 상산(常山). 아버지는 효자 임광언(林光彦)이며, 임호철(林昊喆)의 동생이다. 임우철(林禹喆)은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부모를 봉양하였다. 어버이를 모시는 데 형 임호철과 더불어 지극하여 조금도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부모님을 섬기면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상을 당해서는 예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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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으로 낙향한 후 도학을 연마한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본관은 풍천(豊川)이며, 자는 치은(稚殷), 호는 현계(玄溪) 또는 청서(靑墅)이다. 녹문 임성주(任聖周)의 문인인 영서(穎西) 임로(任魯)의 아들이다. 1789년[정조 13]에 태어났으며, 1835년[헌종 원년] 음사(蔭仕)로 가감역(假監役)을 시작으로 벼슬에 나가 전라도 창평(昌平)현령·금천(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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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상산(常山). 호는 극재(克齋)이다. 임형(林灐)는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효성이 지극하여 향천(鄕薦)을 세 차례, 도천(道薦)을 한 차례 받았는데, 이에 대하여 1932년 진천군에서 펴낸 『상산지(常山誌)』「학행(學行)」 편에 ‘임형호극재상산인수업우전재임선생지문유효행삼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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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진천(鎭川)[또는 상산(常山)]. 아버지는 효자로 이름 난 임광언(林光彦)이고, 동생으로 역시 효자인 임우철(林禹喆)이 있다. 임호철(林昊喆)은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부모를 봉양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어버이를 모시는 데 지극하여 조금도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가 병이 나자 근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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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옥천(沃川).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문인인 전승업(全承業)의 고손자이다. 유학자로 학문이 뛰어나고 경학(經學)에 몰두하여 여러 차례 향천(鄕薦)을 받았다. 이에 관한 내용이 『상산지(常山誌)』와 『진천군지』 등에 실려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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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유학자이자 효자. 본관은 옥천(沃川). 호는 쌍암(雙岩). 아버지는 상주목사를 지낸 전팽령(全彭齡)이다. 전엽(全燁)[1505~?]은 1543년(중종 38)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별세하자 60세 가까운 늙은 몸으로 3년간 시묘하면서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 시묘하는 도중에 산소 부근에서 샘물이 솟아오르고, 하얀색 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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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작을 시조로 하고, 최유경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진천군 세거성씨. 전주최씨(全州崔氏)는 계보를 달리하는 4파로 갈라져 있는데, 완산부개국백(完山府開國伯)에 봉해진 최순작(崔純爵)을 시조로 하는 문열공파(文烈公派), 완산군(完山君)에 추봉된 최균(崔均)을 시조로 하는 사도공파(司徒公派), 완산군 최아(崔阿)를 시조로 하는 문성공파(文成公派), 완산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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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유학자. 본관은 연일(延日).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7세손이다. 정덕환(鄭德煥)은 삼환재(三患齋) 채지홍(蔡之洪)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행동에 무게가 있고 학문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일평생 학문을 깊이 연구하였으나, 현재 남아 있는 자료는 부족한 편이다. 그의 행적에 대해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와 『상산지(常山誌)』, 『진천군지』 등에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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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학자. 본관은 연일(延日).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효자이자 유학자인 신와(愼窩) 정재경(鄭在褧)이다. 정우섭(鄭友燮)은 학문이 뛰어나고 지식이 풍부한 학자로서 1932년 『상산지(常山誌)』를 저술하였다. 상산(常山)은 진천의 다른 이름이니, 『상산지』는 곧 진천의 읍지(邑誌)이다. 현재 『상산지』는 1825년(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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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유학자이자 교육가. 본관은 연일(延日).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후손으로, 죽계사 창건기를 쓰고 『상산지(常山誌)』를 서술한 송강의 8세손인 정재경(鄭在褧)의 고손이다. 정운하(鄭雲夏)는 고종 대에 지금의 진천군 백곡면 사송리에서 태어났다. 경사(經史) 연구에 힘써 박학 통달하였다. 1910년 일제의 강점이 이루어지자 사설 서숙을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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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이자 학자.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공실(公實), 호는 신와(愼窩).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8세손으로 아버지는 누항(陋巷) 정용환(鄭龍煥)이며, 조암(照庵) 정해필(鄭海弼)과 『상산지(常山誌)』를 쓴 정우섭(鄭友燮)이 그의 손자이다. 정재경(鄭在褧)[1780~?]의 아버지가 그림 속 용이 꿈틀거리며 하늘로 올라가는 태몽을 꾸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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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 잠덕산 지장사 터에 있는 조선시대 부도. 지장사 터 부도는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 산 40-8번지 옛 절터인 지장사 터에 있는 석종형 부도로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부도는 묘탑을 가리키는 것이며, 묘탑은 사리를 봉안한 탑이므로 이와 같은 종류의 탑은 모두 묘탑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묘탑, 곧 부도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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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에 있는 고려 전기의 돌다리. 진천 농다리[鎭川 籠橋]는 진천읍을 관통하는 백사천과 이월면을 적시는 덕산 한천천이 합류해 흐르는 백곡천에 놓인 돌다리이다. 농다리·수월교라고도 하며, 지네를 닮았다고 하여 지네다리라고도 불린다.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 농다리는 조성 당시의 상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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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신정리 용화사에 있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전기의 석조 불상. 진천군 진천읍 신정리 584-4번지 용화사 경내에 있는 진천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며, 1984년 12월 31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8호로 지정되었다. 법주사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진천 용화사 석조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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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성석리에 있는 삼국시대 토축 산성. 진천 대모산성은 616년(진평왕 38)에 백제의 공격을 받은 것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모산성(母山城)으로 비정하려는 설이 있으나 대모산성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의 지리지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일제강점기의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상산지(常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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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문신.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군범(君範), 호는 봉암(鳳巖)·삼환재(三患齋)·봉계(鳳溪)·사장와(舍藏窩).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채영용(蔡領用)이다. 채지홍(蔡之洪)[1683~1741]은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암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는데, 8세 때 “달이 동산 위에 떠오르니 그 모습이 태극과 같구나[月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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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능희를 시조로 하고, 이정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진천군 세거성씨. 청주이씨(淸州李氏)의 시조 이능희(李能希)는 고려 개국공신으로 벼슬이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다. 시조 이하 대대로 청주(淸州)에 세거(世居)하였고, 또 10세손 이계감(李季瑊)이 고려조에서 낭성군(琅城郡)[옛 청주, 지금의 청원군 낭성]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청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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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화순(和順). 충절공(忠節公) 최영유(崔永濡)의 8세손이다. 화순최씨(和順崔氏)의 시조는 최세기(崔世基)이다. 고려시대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그가 화순의 옛 이름인 오산(烏山)에 봉해짐으로써 화순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최세기와 같이 몽골군의 침입 때 공을 세우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최부(崔傅)를 함께 시조로 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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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문신이자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조선왕조 개국원종공신 평도공(平度公) 최유경(崔有慶)의 9세손이며, 효자 최사립(崔斯立)의 증손이다. 최사립 이후 최면성에 이르기까지 자손이 모두 효행으로 이름을 얻었다. 최면성(崔勉誠)은 사마시(司馬試)의 양과, 즉 생원시·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 대의 혼란기를 맞이하여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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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 지역 사람들이 영위해 온 삶의 내력을 기록한 책. 향토지는 지역사 연구의 기초 자료로서 전근대 시기 중앙 집권적 수취(收取) 체제의 기초로부터 시작하여 최근의 도지·시지·군지, 마을지에 이르기까지 지역의 사정을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지역 연구자의 애향심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문화와 역사를 조사·연구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충청북도 진천 지역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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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면에 활동 흔적이 남아 있는 조선 후기의 고위 문신. 조선후기 현종·숙종 대 온건파 남인세력인 탁남(濁南)의 영수로 활약한 고위 문신이다.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여차(汝車)이고, 호는 묵재(默齋)·휴옹(休翁)이다. 허초(許礎)의 증손으로 조부는 허잠(許潛)이고, 아버지는 부사 허한(許僩)이다. 24세인 1633년(인조 11) 생원·진사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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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와 진천읍 지암리에 걸쳐 있는 삼국시대 토축 산성. 고문헌 기록에 환희산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 축조 경위 등의 연혁은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1932년에 간행된 『상산지(常山誌)』에 환희산(歡喜山)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산성의 존재는 기록되지 않았고, 그 후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산성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