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13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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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瓷-始作海南-靑瓷 |
영어공식명칭 | The Beginning of Korean Celadon, The Story of Haenam's Celadon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화원면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한성욱 |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의 초기 청자 생산지로 유명한 화원면과 산이면에 대한 이야기.
[개설]
한국은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청자와 백자 등의 자기를 생산한 곳이다.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에는 중국 월주 지역에서 새롭게 들어온 청자 제조 기술과 전통적인 영암 구림리 도기 제작 기술을 더하여 초기 청자를 생산하였다. 이어 대규모의 집단 가마터는 산이면으로 건너가 일상생활 청자를 비롯하여 철화청자를 생산하여 공급하였다.
[중국 청자와 해남 청자 발생]
중국의 자기 생산은 당(唐) 후기[7세기 중기~907]에 세련되어 오대(五代)[907~10세기 중기]에 이르면 완벽한 수준에 이른다. 하북성 형주요(邢州窯)를 비롯한 북방에서는 백자를 주로 생산하였으며, 절강성 월주요(越州窯)을 비롯한 남방에서는 청자를 중심으로 제작하였다. 월주요 청자는 영파(寧波)를 통해 신라와 일본 등 동북아를 비롯하여 동남아와 중동까지 널리 전파되었으며 고려청자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반도에 중국 자기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시기는 신라 하대로 당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유학생과 유학승(留學僧) 등에 의해 음다문화(飮茶文化)가 확산되면서 시작되었다. 즉, 다도구의 핵심인 다완을 직접 생산하려는 욕구에 의해 중국의 자기 제작 기술을 신속하게 받아들여 이를 생산하였다. 특히, 월주요가 위치하였던 오월(吳越)이 송(宋)에 의해 멸망하면서 각지로 흩어진 일부 장인들이 고려에 유입되어 기능을 전수하였던 것이다. 내적으로는 삼국시대 이후 발달한 도기 제작기술이 밑바탕이 되었다. 청자는 처음 전국에서 생산하였으나 11세기가 되면 강진과 해남에 집약되어 고려만의 특징적인 청자로 발전하였다. 전라남도 지역에 요장이 집중되고 독창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던 배경은 우선 완도 청해진을 중심으로 강력한 해상 세력을 구축하여 대외 무역을 독점하였던 장보고의 역할이 매우 크다. 이때 유통되었던 중국 자기가 넓게 확산되면서 자체 생산에 대한 욕구가 발생하였으며 마침내 청자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닷길을 통해 중국의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수용하였으며 신속한 공급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그런데 중국 기술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개경을 중심으로 한 중서부 지역과 달리 전라도 지역은 가마 축조 기술과 그릇을 굽는 방법 등에서 큰 차이가 있다. 중서부 지역은 중국식인 벽돌로 가마를 축조[塼築窯]하고 있으나 전라도 지역은 전통 방식인 진흙을 이용하여 가마를 축조[土築窯]하고 있다. 또한, 벽돌 가마는 땔감이 타는 연소실에 불턱이 있으며 40m 내외의 길이를 갖추고 있으나 진흙 가마는 불턱이 없으며 10~20m 이내로 축조되고 있어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전축요는 그릇을 한 번만 구어 완성하고 있으나 토축요는 두 번 굽고 있으며, 중서부 지역은 청자와 함께 백자를 제작하고 있으나 전라도 지역은 청자와 흑자를 함께 생산하고 있다. 따라서 전라도 지역의 진흙 가마는 전통적 도기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중국의 신기술을 도입하여 운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화원면 초기 청자 가마터]
해남군 화원면은 해남군 북서쪽 끝에 있는 화원반도의 중심 지역으로 목포시와 인접해 있다. 화원면은 삼면이 바다이며 남북으로 길게 산맥이 뻗어 있어 산악이 많고 평야가 적다. 그러나 대부분의 산들이 완만한 경사의 구릉으로 이루어져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해남 화원면 청자 요지의 중심은 신덕리 일대로 신덕 저수지를 중심으로 사방이 나지막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가마터는 신덕 저수지 양쪽의 구릉과 골짜기, 경작지 등에 밀집 분포되어 있는데, 훼손이 적고 퇴적층이 두터워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다. 가마터는 신덕리[54곳]와 금평리[2곳]에서 주로 확인되는데 80~90기가 분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초기 청자 가마가 집단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곳은 국내에서 해남 화원면 지역이 유일하다. 따라서 한국 자기 발생의 단서와 초기 청자의 기형 변화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가마터로 주목받고 있다.
출토 유물은 청자, 흑자, 도기, 가마 도구 등이 있다. 청자의 기종은 대접과 완, 접시, 화형접시, 병, 유병, 편병, 항아리 등으로 다른 지역 가마에 비해 단순하다. 문양은 저부 파편에 종선문이 시문된 사례를 제외하고는 확인되지 않는다. 받침은 황백색 내화토 빚음에 모래와 수비토가 혼합되어 있으며, 대부분 연질 도기질에 녹갈색 유약이 얇게 시유되었다. 따라서 도기 제작 기술을 계승한 초보 단계의 청자로 추정된다. 흑자는 반구병과 편병, 유병, 항아리 등 저장 또는 운반 용기를 중심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흑자는 영암군 구림리 등 신라 하대의 전통 도기 제작 기법을 계승하고 있어 해남 청자가 전통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중국 기술을 도입하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양질 청자 제작 가마터에서는 저장 용기 등 모든 제품을 청자 또는 백자로 제작하지만 해남처럼 조질 청자 제작 가마에서는 음식 용기와 저장 용기에 질적 차이가 있다. 즉 음식 용기는 양질로 제작하지만 저장 용기 등 큰 그릇은 조질로 제작하고 있다.
가마 도구는 갑발과 갑발 받침, 도지미 등이 출토되고 있다. 갑발은 공기구멍이 있는 원통형과 측면에 음각 표시가 있는 등 다른 지역 초기 갑발과 비슷한 형식도 확인된다. 갑발의 바탕흙은 청자와 비슷하지만 강진군 대구면 출토 초기 갑발에 비하면 대부분 거칠다. 거친 이유는 근본적으로 청자의 비탕 흙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 갑발을 재활용하고 있어 갑발의 내화도가 매우 우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화원면 출토 청자의 품질은 해무리굽 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조질 중심이다. 해무리굽 완은 다른 그릇에 비해 바탕흙과 유색 등이 상대적으로 우수하며 1점씩 갑발에 넣고 구웠다. 그러나 이외의 그릇은 대부분 도지미 위에 포개 번조하고 있으며 유약과 바탕흙이 해무리굽 완에 비해 거칠다. 즉, 조질과 양질에 따라 번조 방법과 바탕흙, 유색 등이 상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초벌 파편들이 확인되지 않아 재벌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데, 조질품을 중심으로 생산하였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제작 집단이 전통 도기 제작 기법을 계승하고 있어 도기처럼 초벌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해무리굽 완은 내저곡면과 내저원각이 공존하며 굽바닥 너비도 다양하다. 즉, 고식 해무리굽에서 변형 해무리굽까지 확인되고 있어 짧은 시기에 변천 소멸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초기청자의 대표적 기형 가운데 하나인 꽃모양 접시는 외면에서 살짝 눌러 제작하였는데, 꽃모양 접시에서는 퇴화 단계의 것이다. 따라서 화원면 청자의 제작 기간은 초기 청자 제작 시기에 도입되어 50년 내외의 매우 짧은 기간 동안 대규모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이면 청자 가마터]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를 중심으로 산이반도에 분포하는데, 초성리 남쪽에서 진산리에 이르는 약 6㎞의 옛 해안선에 집중적으로 산재한다. 진산리는 경사가 완만한 낮은 구릉지대로 질 좋은 조점토 광맥이 해안 단애면을 따라 곳곳에 노출되어 있어 조점토를 채취하여 쉽게 도자를 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형이 점토와 황토로만 이루어져 바닷물에 의한 침식이 지속되어 가마가 유실되는 등 원래의 지형이 크게 변형되었다. 현재는 영산강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해안이 간척되어 환경이 완전히 변화되었다. 해남 진산리 청자 요지는 산이반도 서북단의 구성리 2기와 반도 중간 지점의 진산리 남쪽 해안과 내륙 연결 지역에 80기, 초송리 24기 등 모두 106기가 분포하고 있다. 퇴적층은 현재 논으로 개간된 옛 모래사장에서 대부분 확인되었으며 퇴적이 잘 남아 있는 5곳 1만 3298㎡[4,022평]이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출토품은 청자와 흑자, 도기, 가마 도구 등이 있으며 극히 소량의 백자편이 확인되고 있다. 청자는 거친 바탕흙에 조잡한 유약이 시유된 조질청자와 정선된 회청색 바탕흙에 담청녹색의 유약이 시유된 양질청자로 나누어지는데, 조질의 녹청자가 대부분이다. 기벽은 얇으며 대접과 접시의 경우 구연부는 내만형이 일부 있으나 대부분 외반되고 동체부는 S자 곡선을 이루며 굽은 대마디형과 수직형, V자형 등으로 굽깎기가 단정하지 않다. 또한, 바탕흙은 청백색과 회백색, 회색, 회흑색, 흑색 등으로 철분과 모래가 섞인 조점토를 사용하고 있어 표면이 거칠다. 고급 청자는 모래가 전혀 섞이지 않은 질 좋은 점토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유약은 대부분 바탕흙에 철분이 많이 함유되어 녹갈색 또는 암녹색을 띠고 있는데, 굽 주변을 시유한 것과 시유하지 않은 것이 섞여 있다. 회백색 굴 껍질 가루와 내화토 가루 등을 굽바닥 4~5곳에 얇게 받쳐 구웠는데, 대접과 접시는 내저면에도 받침을 받쳐 포개 구웠다. 그릇의 종류는 대접과 접시류가 가장 많으며 발과 완, 잔, 매병, 반구병, 병, 호, 항, 탁잔, 합, 주전자, 반, 장구 등이 확인된다. 문양은 순청자의 경우 대부분 무문인데 일부 음각으로 한 줄 선을 돌리거나 연판문, 국화문, 초문 등을 거칠게 시문한 것이 있다. 양각은 연판문이 소량 출토되고 있다. 대부분의 가마터에서 확인되는 철화청자는 병과 장고, 주전자, 대반을 중심으로 완, 잔 등에서 확인된다. 문양은 간략한 초문과 초화문, 모란문, 당초문, 국화문 등이 자유분방하게 시문되었다. 또한, 청자철채매병과 청자철채철백화매병 등이 확인된다.
대부분의 가마터에서 도기류가 확인되는데, 회흑색 또는 회색의 거친 태토 위에 흑갈색과 흑색의 짙고 불투명한 유약을 두텁게 바른 흑갈색 시유 도기와 유약을 바르지 않은 무시유 도기가 함께 출토되고 있다. 기종은 호와 반구병, 편병, 대발, 완, 등이 있는데, 큰 입지름과 풍만한 몸통, 평저 굽을 지닌 반구호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경질과 연질의 도기류와 시루편이 확인되는데, 대부분 경질의 회청색 또는 회흑색의 호편으로 굽은 평저형이다. 이들은 기벽이 두껍고 입술은 외반되며 목 부분에 음각 파상문이 있다. 몸통 전면에는 삿자리 무늬가 새겨져 있어 신라 하대의 도기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산이면 지역은 조질 청자를 중심으로 일부 고급 청자를 생산하였다. 그러나 이들 고급 청자도 해남에서의 상대적인 고급품으로 강진의 양질 청자에 비하면 저급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철화청자의 대표적 생산지로 청자의 변천을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완도 어두리 해저유적 출수 청자와 기형과 제작 수법 등이 동일하여 산이면에서 제작되어 바닷길을 통해 유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산이면 지역 청자는 11세기대를 중심으로 운영된 후 점차 쇠퇴, 소멸한 것으로 추정된다.
[해남 청자의 특징과 활용]
가마터가 분포한 산이면과 화원면 지역은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겨울과 여름의 기온 차가 심하지 않고 연중 온난하여 살기 좋은 곳이다. 또한 계곡을 끼고 있어 땔감과 수량이 풍부하며, 바닷길을 통해 공급이 원활하여 가마 운영에 매우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그리하여 화원면 56곳과 산이면 106기 등 국내에서 가마터가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다. 청자의 특징을 살펴보면 화원면에서 먼저 시작하였으며, 이후 산이면으로 제작 집단이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화원면은 청자 발생기에 대규모로 운영된 국내 유일의 요장으로 한국 자기 발생을 규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산이면도 고려 전기의 짧은 시기에 대규모로 운영되었는데, 일시에 많은 가마의 운영으로 주변의 땔감과 바탕흙 등의 재료가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강진 유형의 고급 청자가 정착되고 부안 지역으로 고급 청자 가마가 확대되면서 상대적으로 품질이 낮은 해남 초기 청자는 자연스럽게 쇠퇴한 것으로 생각된다. 화원면 지역의 입지 조건은 해변에 있으나 보다 내륙 지역에 있다. 전라도와 중서부 지역 대부분의 초기 청자 가마와 비슷한 조건이다. 산이면 지역은 바로 해안과 인접하여 바탕흙과 물에 상대적으로 염분을 많이 축적하고 있어 조질 청자가 될 수밖에 없는 제작 환경이다.
해남 지역 청자는 강진 지역 청자에 비해 대부분 품질이 떨어져 지방과 하급 관청 등의 수요를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부 고급품도 제작되었는데 화원면 청자의 경우 해무리굽 완은 질 좋은 바탕흙과 유약을 사용하였으며 내저면에 받침 흔적이 없고 갑발에 넣어 굽고 있어 제품이 우수하다. 산이면 청자는 철화청자와 철채청자 등이 매우 우수한데, 특히 장고와 항아리, 병, 주전자, 대야 등은 진산리에서만 확인되고 있다. 또한 수량은 적지만 갑발에 넣고 우수한 유약과 세련된 문양을 사용하여 정성을 들인 양질청자도 확인된다.
해남 지역 가마에서는 대부분 도기들이 함께 출토되고 있다. 특히 화원면 출토 흑자는 신라 하대에 운영되었던 영암 구림리 도기 가마 출토품과 유사하여 이들이 도기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여 청자를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해남 지역에 초기부터 많은 가마가 운영되고 독창적인 도자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닷길을 이용한 신속한 기술 유입과 용이한 원료 수급, 편리한 공급을 위한 지리적 유리함도 있었으나 여러 조건을 수용할 수 있었던 우수한 문화와 세력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해남 가마에서 생산한 청자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철화청자이다. 철화청자는 강진이나 부안 등에서도 만들었으나 해남에서 특히 많이 생산되어 널리 공급되었었다. 산화철을 안료로 사용하여 자연을 소재로 다양한 무늬를 자유분방하게 그리고 있어 해남 청자의 우수성을 잘 입증하고 있다. 또한 철화 기법은 청자 이후의 분청사기와 백자에서도 중요 시문 기법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전통 시문 기법이다. 해남 청자는 역사성과 전통성을 두루 갖추고 있으며 그릇의 표면에 붓을 이용한 다양한 무늬를 표현할 수 있는 철화청자를 특성화하여 상품 개발과 전시 등에 적극 활용할 수 있다. 또한 해남의 우수한 청자 문화를 널리 알릴 수 있는 공간 마련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