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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발과 두사충의 교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1740
한자 李時發-杜師忠-交分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한석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지명 유래담|시은담|풍수담
주요 등장인물 이여송|진인|두사충|이시발
관련지명 지전마을|양촌지도보기
모티프 유형 처형 위기에서 구출해 준 이시발의 시은|명당을 알려준 두사충의 보은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에서 이시발두사충 사이의 시은과 보은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이시발과 두사충의 교분」은 임진왜란 당시 원병으로 온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의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왜군과의 싸움에서 참패를 당해 처형될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준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1569~1626]의 시은담(施恩談)이자, 이에 보답하고자 천혜의 명당을 이시발에게 알려주는 두사충의 보은담(報恩談)이다.

[채록/수집상황]

2004년 진천상산고적회에서 간행한 『진천의 구비문학』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조선은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그의 사위 진린(陳隣) 및 명풍수 두사충을 위시한 4만의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평양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辰]의 일본군을 격파하는 등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이여송이 진천 인근 지역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두사충에게 “어느 곳에 진을 구축하면 승리할 수 있겠는가?” 하며 자문을 구했다. 두사충은 산세 및 지세를 염두하고 조심스럽게 한 곳을 주둔지로 정해 왜군의 반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여송은 패전의 책임을 두사충에게 물어 그를 이내 처형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곳에 은거하고 있던 경주이씨 11세손 벽오 이시발이 자청하여, “전세의 결과는 두사충과 관련이 없습니다. 또 그렇다 하더라도 고의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오랜 전투에 지친 우리 병사들의 사기가 문제되었을 따름이니, 청컨대 두사충을 사면해 주옵소서.” 하며 수차례에 걸쳐 이여송을 설득했다. 결국 이시발의 진정을 이여송이 참작하여 두사충은 사면될 수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이시발두사충의 교분이 날로 두터워졌다. 또한 두사충이시발의 은혜를 항상 마음속에 두고 매양 갚을 도리를 숙고하였다.

어느 날, 두사충이 산세를 살펴보다 천혜의 명당을 발견하고 이 자리를 이시발에게 일러주었다. 바로 오늘날 와우형(臥牛形)의 지전(芝田)마을 뒷산이다. 아직도 이 자리 아래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있으며, 건너편에는 양지 바른 들이 펼쳐져 있다. 그 후에 이를 ‘볕이 좋은 들’ 즉 양촌(陽村)으로 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이시발과 두사충의 교분」의 주요 모티프는 ‘처형 위기에서 구출해 준 이시발의 시은’, ‘명당을 알려준 두사충의 보은’ 등이다. 이는 은혜를 입은 사람이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명당으로 갚아주고, 둘의 교분이 날로 깊어졌다는 우애담이다. 또한 두사충이시발에게 알려준 명당자리는 지금의 지전마을 뒷산으로 ‘양촌’이라고 불린다는 지명유래담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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