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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335
한자 壬辰倭亂
영어음역 Imjinwaeran
영어의미역 Japanese Invasion to Korea in 1592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전호수

[정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진천군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본과 일어난 전쟁.

[개설]

1592년(선조 25) 음력 4월 13일 일본군의 제1번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산포 침략을 시작으로 1598년(선조 31) 11월 노량해전(露粱海戰)을 끝으로 사실상 종결될 때까지 무려 7년간 한반도를 전화(戰禍)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한 중세 동북아시아 세계의 국제전적 교전이었다. 전쟁의 전개 과정은 크게 네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는 전쟁 발발 이후 1592년 8월 명나라군의 참전과 평양성전투까지, 제2기는 평양성전투 이후 1593년 2월 행주대첩까지, 제3기는 행주대첩 이후 정유재란 이전까지, 제4기는 정유재란의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 전투는 주로 제1기와 제2기에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행주대첩 이후는 초반의 연패와는 정반대로 일본군이 부산을 중심으로 남해안에 소위 왜성(倭城)을 쌓고 장기 농성전에 돌입하였던 시기이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제4기의 기간에 다시 한 번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즉, 임진왜란의 전 기간에 걸쳐 조선군이 열세에 있었던 것은 아니며, 또한 전국이 전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것도 아니다. 일본군은 속도전에 능했기 때문에 그 점령 지역은 주요 간선로 및 그 주변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충청북도 진천 지역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일본군 제3번대의 진격로 상에 위치해 있었으며, 전쟁의 초기 상황은 다른 지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즉 중로(中路)를 택해 한양으로 진군한 고니시[小西]의 제1번대와 좌로(左路)를 따라 울산 방면으로 진군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제2번대에 이어서, 구로다[黑田]의 제3번대는 김해~성주를 지나 추풍령을 넘어 영동~청주를 거쳐 진천으로 쳐들어왔던 것이다. 이에 대한 진천 지역의 대책은 다른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전쟁 초기부터 비교적 주목할 만한 몇 가지 대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주요 전투 지휘관 및 의병장]

1. 홍지(洪趾)

임진왜란 발발 당시 진천 지역의 방어책임자는 진천현감 홍지였다. 물론 당시의 전법이었던 『제승방략』 체제에 따른다면 청주진관 휘하의 절제도위를 겸하는 진천현감은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청주로 진군하든가, 아니면 도순변사 신립(申砬)[1546~1592]의 지휘에 따라 충주의 탄금대(彈琴臺)로 군대를 이동시켜야 했다. 그러나 홍지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병영이 있는 내포(內浦) 지역으로 달아났다.

2. 김효건(金孝騫)

이렇듯 지휘관의 부재 속에서 그 자리를 메운 인물은 진천현감 휘하의 집강(執綱)[향약소 또는 향청의 책임자]이었던 김효건이었다. 김효건은 관군을 지휘할 주장(主將)이 달아나 버린 상황에서 관민(官民)을 수습하여 지금의 문백면 태락리에서 진천읍 원동으로 넘어오는 고갯길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왜적을 급습하여 타격을 주는 등의 활약을 통해 적의 후방을 교란하는 한편 민심을 안정시켰다. 김효건의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고려 말의 절신(節臣) 안렴사 김사렴(金士廉)의 6대손이다.

3. 이정영(李廷英)

한편 당시 진천 출신의 관장(官長)으로 그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다 전사한 인물도 있었으니, 다름 아닌 음죽현감(陰竹縣監) 이정영이었다. 그의 본관은 양성(陽城)이고, 호는 회헌(晦軒)으로 진천 출신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음죽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조정의 명령에 따라 관내의 군사를 징발하여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 장군이 지정한 집결지인 충주로 나갔다. 그리고 신립 장군이 배수진(背水陣)으로 대응한 탄금대 전투에서 부장(部將)으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4. 이시발(李時發)

임진왜란 당시 진천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에 대항한 인물로는 이시발[1569~1626]이 있었다. 이시발의 본관은 경주(慶州)로 자는 양구(養久)이며, 호는 벽오(碧梧) 또는 후영어은(後潁漁隱)으로 임진왜란 당시 승정원(承政院) 가주서(假注書)로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국왕 선조가 피난길에 오르자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청천(靑川)의 산골로 피신시킨 후 청주에서 창의한 의병장 박춘무(朴春茂)의 휘하에 들어가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이듬해 한양이 수복되자 조정으로 돌아가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의 접반관(接伴官)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문신이면서도 국방·군사 방면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5. 임수전(林秀筌)임수명(林秀蓂)

임수전은 동생 임수명과 더불어 1592년 8월 청주에서 기병(起兵)한 박춘무·이시발 의병진(義兵陣)이 진천에서 왜병을 격퇴하고 수원 방면으로 북상한 이후에 진천 지역에서 창의기병(倡義起兵)하였다. 임수전은 진천에서 모집한 의병군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경기도 죽산 봉성(鳳城)에서 왜적과 싸워 커다란 손실을 입혔으나 결국 1592년 12월 13일 전사하였다. 한편 동생 임수명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 경기도 안성에서 기병한 홍계남(洪季男) 의병군과 더불어 진천군 백곡면 협탄령(脇呑嶺)에서 북상하는 왜병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려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임수전임수명 형제의 본관은 상산으로 상산임씨의 세거지인 진천읍 구곡리 구산동 출신이다.

6. 이영남(李英南)

끝으로 임진왜란 시기에 활약한 진천 출신의 지휘관으로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로 활동한 이영남[1563~1598] 장군을 들 수 있다. 이영남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상우수영 휘하의 율포권관(栗浦權管)으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전라좌수군에 연합 지원함대의 구성을 요청하는 청병사절(請兵使節)로 활약하였다. 이후 소비포권관(所非浦權管)·강계부판관(江界府判官)·율포만호(栗浦萬戶)·가리포첨사 등을 역임하면서 주로 해전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특히 그는 가리포첨사로 있던 1598년(선조 31) 11월 18일 일본군과의 최후의 해전이었던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을 보좌하여 역전(力戰)하다가 탄환에 맞아 전사하니 향년 36세였다. 이영남은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사수(士秀)로 1563년(명종 18) 진천군 덕산면 기전리에서 태어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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