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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이야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1588
한자 吉祥祠-
영어의미역 Story of The Kilsangsa
이칭/별칭 「구당재 전설」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집필자 박명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설화|사당 유래담
주요 등장인물 충청감사|하인|김유신|진천현감
관련지명 잣고개|소흘산|성암 부락지도보기
모티프 유형 사당 앞 하마의 금기|충청감사의 무뢰와 죽음|사당의 이전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서 김유신 장군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길상사 이야기」김유신 장군 위패와 영정을 모신 진천 길상사 터와 사당에 관한 유래담이다. 진천 길상사는 진천 도당산에 있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흥무대왕 김유신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으로 충청북도 기념물 제1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신라시대부터 김유신의 태가 묻힌 태령산 아래에 사당을 건립하고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 후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사당이 소실되자 1851년 정재경·박명순(朴命淳) 등이 백곡면 가죽리에 죽계사라는 이름으로 사당을 재건하여 조감과 함께 장군의 위패를 봉인하였다. 1864년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죽계사가 철거된 이후 진천읍 벽암리 소홀산 아래 ‘서발한’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사당을 짓고 계속 제향을 하였다.

1922년 대홍수 때 이 사당은 붕괴되었고, 4년 후 후손 김만희의 주선과 진천 유림들의 후원으로 도당산성 안에 신축한 것이 현재의 진천 길상사이다. 6·25전쟁 때 심하게 파손되어 중수하였고, 1976년 사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전면 신축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채록/수집상황]

2004년 충북학연구소에서 집필하고 충청북도에서 간행한 『이야기 충북』에 수록되어 있다. 같은 내용의 「구당재 전설」은 1982년 진천문화원에서 출간한 『내 고장 전통 가꾸기』와 1994년 진천군지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한 『진천군지』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구당재라고 불리는 서발한 사지는 바로 ‘김서발한사우’의 사당 터를 말한다. 이곳은 진천읍에서 청주 방향으로 가다가 잣고개 중턱의 소흘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1864년부터 흥무대왕 김유신 장군 부처와 그의 아들 김원술(金元述) 부처 등 4위의 목형화상(木形畵像)을 모셨던 곳이다. 이곳에 사당을 세우게 된 내력으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사당은 원래 잣고개 마루턱(잣고개와 용소 부락의 중간 지점)에 있었다. 나라에서 제향을 올렸던 이 사당 앞을 지나는 사람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말을 내려서 걸어가야 했다. 만약 말에서 내리지 않으면 말굽이 그 자리에 붙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어느 해인가 충청감사가 진천 고을을 거쳐 이곳을 지나던 중 말을 탄 채 그대로 지나가려고 하였다. 하인이 말에서 내릴 것을 간청하였으나 충청감사는 그대로 말을 몰 것을 명하였다. 말이 사당 앞에 이르자 과연 네 말굽이 땅에 붙어 꼼짝할 수가 없었다. 화가 난 충청감사는 말에서 내려 칼을 뽑아 애꿎은 말의 목을 베어 사당 안 장군의 화상에 온통 피범벅을 해놓고 가버렸다. 그러나 멀리 가지 못하고 지금의 성암 부락 앞에 있는 개울을 건너다 일행이 모두 빠져 죽고 말았다.

그날 밤 진천현감이 잠을 자는데 꿈속에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나는 김유신이오. 무례한 충청감사란 자가 내 집과 몸을 더럽혀 살 수가 없으니 현감이 사당을 다른 곳으로 옮겨 주시오. 내일 아침 등청하는 대로 동헌 앞에서 백지 두 장을 띄워 그것이 떨어지는 곳에 사당을 지어 주시오.”라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 진천현감이 등청하여 백지 두 장을 띄우니 한 장은 하늘 높이 올라가 사라지고 한 장은 낮게 떠 가다가 앉은 곳이 ‘구당재’ 터였다. 그리하여 그곳에 사당을 짓고 장군 내외와 그 아들 내외의 목형화상을 모셨는데, 인근 주민들이 그 영험을 믿고 수시로 찾아와 치성을 드린 까닭으로 ‘당재’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구당재의 사당 터가 대명당’이라 하여 그곳에 묘를 쓰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는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사당 터에 묘를 쓰면 그날 밤 상주가 죽게 된다고 하여 사당 터에는 지금까지도 묘가 없으며, 그 터 주위로만 수십 개의 묘가 무질서하게 자리하고 있다.

[모티프 분석]

「길상사 이야기」의 주요 모티프는 ‘사당 앞 하마의 금기’, ‘충청감사의 무뢰와 죽음’, ‘사당의 이전’ 등이다. 나라에 제향을 올리는 신성한 사당을 감히 말을 탄 채로 지나가려다가 말발굽이 움직이지 않자 제 분에 못 이겨 말의 목을 베어 사당 안 김유신 장군의 화상에 말의 피를 칠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한 충청감사는 결국 죽고 말았다. 그 후에 진천현감의 꿈에 김유신 장군이 나타나 하소연을 한 이야기가 더해져 더욱 흥미 있게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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