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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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佛木洞驪陽陳氏墓室新建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37[세종로 1-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호걸 |
[정의]
1909년 여양진씨의 재실을 새롭게 건립하고 그 내력을 새긴 현판.
[개설]
불목동여양진씨묘실신건기(佛木洞驪陽陳氏墓室新建記)는 여양진씨(驪陽陳氏)의 선영(先塋)[조상의 무덤 또는 조상의 무덤 근처의 땅]이 있던 충청남도 연기군 금남면 반곡리[현 세종특별자치시 반곡동]의 불목동(佛木洞)에 재실(齋室)[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을 신축한 것을 기록한 현판이다. 불목동여양진씨묘실신건기(佛木洞驪陽陳氏墓室新建記)는 진병갑, 진병돈 형제가 보관하고 있다가 2006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진세현(陳世顯)[1854~1928]이 1909년(융희 3)에 쓴 이 글은 그의 부친 진시책(陳時策)[1831~1906]이 1876년에 쓴 「불모동수도귀정설(佛母洞水道歸正說)」과 연관된다. 불모동과 불목동은 같은 장소를 일컫는 한자 음차어(音借語)이다. 진시책은 불목동(佛木洞)[반곡리 뒤편 괴화산 소재] 선영 주위의 물길을 바로잡는 사역(事役)에 대하여 기록하였고, 진세현은 불목동에 재실을 신축한 것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형태]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평평한 직사각형의 판에 네 테두리를 결합하였다. 크기는 가로 105㎝, 세로 41.5㎝이다. 제목을 포함하여 43행 704자 모두 한자로 쓰여 있다. 흑칠 바탕에 글자를 음각으로 새겼다.
[내용]
현판에 새겨진 기문(記文)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천자(天子)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무덤(墓)이 있으면 반드시 재실을 두어 제사를 지냈다는 말로 시작한다.[自天子至於庶人, 有墓必有室, 此所以奉祭祀] 즉 고대 예제(禮制)에서 재실이 중요한 것이라는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 각지에 흩어져 있는 여양진씨 선조들의 산소(山所)를 열거함으로써 반곡리 여양진씨가 이렇듯 혁혁한 선조들의 맥을 잇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셋째 조부 진경익(陳炅益)[1807~1870]이 계(稧)를 만들어 위토(位土)[묘에서 지내는 제사 비용 마련을 위해서 경작하던 논밭]를 구입하고 석물(石物)[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여러 가지 물건]을 세운 일, 부친 진시책이 물길을 바로잡은 일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마을에서 좀 떨어진 불목동에 재실이 필요하여 세우려 하였지만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이루지 못한 사정을 서술하고 있다.[距村稍遠 林壑深長 可置墓室 而以財力不贍 有志未就者久矣]
넷째 기유년 봄에 족인(族人)[성과 본이 같은 사람들 가운데 복제(服制)에 따라 상복을 입어야 할 정도로 가까운 친척인 유복친 안에 들지 않는 겨레붙이]이 모두 모여 초가집 5칸 규모의 재실을 세운 일과 재실의 풍광, 묘지기를 정한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묘역과 재실에서 해서는 안 될 일, 죄를 지었을 때 종회(宗會)에서 벌을 주고 재실을 잘 가꾸고 제향을 거르지 말 것 등을 후손들에게 당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기문을 쓴 사람[진세현]과 새긴 사람[진동현(陳東顯)], 유사들[진시학(陳時學), 진시량(陳時良), 진시은(陳時殷), 진시창(陳時昌)] 이름을 밝히고 있다.
[현판에 쓰인 불목동여양진씨묘실신건기 원문]
佛木洞驪陽陳氏墓室新建記
自天子至於庶人有墓 必有室 此所以奉祭祀 護松楸者也 我東驪陽之陳 散居八域 墳墓位置不可勝紀 而最顯赫者 二十二世祖考 諱澕 翰林公山所 在京畿龍仁元巖里 十八世祖考 諱斯彦 開城公山所 在坡州泉帖里 十七世祖考 諱仲誠 參判公山所 十五世祖考 諱猷 山陰公山所 俱在坡州三峴里 十六世祖考 諱致中 光陽公山所 在慶尙晋州水谷里 祭享守護之節 綽綽有餘 十三世祖考 諱宇 執義公派雲仍 寓居忠淸公州鳴灘面盤谷里 零替不振 迄今數百年 合爲八九十戶 祀先護墓之節 自來畧備 祖考 諱益悌 嘉善公 會諸族設稧事 買位土奉一祀 定有司護松楸 又立二位石物 崇先裕後之業 至矣盡矣 第先壠 近村後 不須別立齋宮 而里左佛木洞一局 則華山前面 二十一世祖考 諱赫增 通政公以下諸位先塋之地 距村稍遠 林壑深長 可置墓室 而以財力不贍 有志未就者久矣 考 諱時策 處士 嘉善公 引水道歸正 且具三位床石 其繼述之功 於是爲大恒切風樹之感焉 歲己酉仲春 與諸族詢謨 曲築草舍五間 於墓下田上 上棟下宇 用雷天而取象 左繩右矩 以重山而定坐 制度雖乏 壯麗規模 亦見弘遠 遠呑山光 平挹江瀬 幽閴遙? 不可具狀 定墓直授田土 使作業行事 室已成矣 僉請余爲文以記 余乃言曰 豺獺猶知報本 況於人乎 使吾族入斯室者 孝悌之心 可以油然而生矣 或有本孫入斯室者 思拔其邱木 思賣其祭田 或䣴酒雜技 妄論紛競 則非徒獲罪 祖先亦爲得罪於山靈 山靈與先靈幷降大殃 不容陰誅 且當宗會杖治 于墓庭逐出乃已 可不戒哉 可不懼哉 伏願 僉族使斯室 苟美苟完 無壞無漏 後人同志 永世守成 勿替祭享守護之節 是爲大幸也 曲築茅齋不月成 翬飛墓下向空淸 鄭公窆外司難毁 甄氏亭頭思錫名 榭月棟風多曠感 枕山戶水自分明 萬年無壞經營遠 享祀護松如事生
隆熙三年 己酉 四月 八日 十一世孫 主事 世顯 謹記 書
十一世孫 東顯 刻
十世孫 時學 有司
十世孫 時良 有司
十世孫 時殷 有司
十世孫 時昌 有司
[의의와 평가]
여양진씨 문중 묘역의 관리와 제사·재실의 건립 등에 관련된 종중 활동이 누대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종중 활동이 민간 자체 방식으로 형성된 향약(鄕約)이나 족규(族規)에 의해 유지·전승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