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7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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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勳東 |
영어공식명칭 | Lee Hoondong |
이칭/별칭 | 성옥(聲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최성환·이성운 |
출생 시기/일시 | 1917년 10월 11일 - 이훈동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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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92년 - 이훈동 동국대학교 명예 경제학박사 학위 취득 |
수학 시기/일시 | 1997년 - 이훈동 목포대학교 명예 경영학박사 학위 취득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 이훈동 일본전기공업주식회사 쇼화광업소에 견습사원으로 재직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 이훈동 목포 미스모토광업소 재직 |
활동 시기/일시 | 1947년 - 이훈동 조선내화화학공업주식회사 창립 |
활동 시기/일시 | 1953년 - 이훈동 조선내화화학공업주식회사 대표이사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63년 - 이훈동 전남광업회 회장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63년 - 이훈동 목포상공회의소 회장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67년 - 이훈동 동일상역주식회사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74년 - 이훈동 성옥산업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78년 - 이훈동 성옥문화재단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79년 - 이훈동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86년 - 이훈동 대한광업회 회장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86년 - 이훈동 조선내화화학공업주식회사 회장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87년 - 이훈동 전남일보사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87년 - 이훈동 조선내화화학공업주식회사를 조선내화주식회사로 명칭 변경 |
활동 시기/일시 | 1999년 - 이훈동 조선내화주식회사 명예 회장 취임 |
몰년 시기/일시 | 2010년 10월 30일 - 이훈동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3년 - 성옥기념관 개관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4년 - 이훈동 동탑산업훈장 수훈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2년 - 이훈동 은탑산업훈장 수훈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3년 - 이훈동 새마을훈장 근면장 수훈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4년 - 이훈동 국민훈장 모란장 수훈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8년 - 이훈동 제22회 인촌상 특별부문상 수상 |
출생지 |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외입리 |
활동지 | 조선내화주식회사 목포공장 - 전라남도 목포시 해안로 57번길 24[온금동 122-6] |
성격 | 기업인 |
성별 | 남 |
본관 | 원주(原州) |
대표 경력 | 조선내화주식회사 명예 회장 |
[정의]
전라남도 해남 출신의 기업인.
[개설]
이훈동(李勳東)[1917~2010]은 1917년 10월 11일 해남군 황산면 외입리에서 태어났다. 조선내화주식회사 대표이사와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전남일보사를 설립한 기업인이다.
[가계]
이훈동의 본관은 원주(原州)이며, 호는 성옥(聲玉)이다. 할아버지는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한 이종흠(李宗欽)이며, 아버지 이영률(李泳律), 어머니는 이백임(李白任)이다. 부인은 박순심이다.
[활동 사항]
이훈동은 14세까지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으나 일본 제국주의의 교육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던 아버지 때문에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16세에 일본전기공업주식회사에서 운영하던 해남 성산의 쇼와(昭和) 광업소에 견습 사원으로 특채되었다. 1935년 목포 미스모토광업소의 지배인으로 임용되면서 고향인 해남을 떠나게 되었다. 미스모토광업소 사장인 미스모토는 일본인 직원들보다 이훈동에게 임금 지불과 수출, 경리 등 주요한 업무를 맡기며 각별한 신뢰를 보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면서 미스모토 사장도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광업소는 휴업에 들어갔다. 이때 이훈동은 고향 해남으로 돌아와 2명의 일꾼을 두고 2년 동안 잠시 농사를 지으면서 미래에 대한 구상을 하였다. 이훈동은 1946년 독일 여행 중 가스케 박사를 만나 내화물에 대하여 알게 되었고, 귀국 후 성산광산의 운영권과 완도 노화광산을 인수하여 내화물 사업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1947년 5월 15일 조선내화화학공업주식회사가 창립된 뒤 당시 납석과 고령토, 점토 등을 납품하던 이훈동은 전무로 있던 친구 김봉귀의 권유에 따라 상무로 취임해 경영에 참여하였다. 한국전쟁 시기 조선내화화학공업주식회사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이로 인해 운영과 경영이 어려워지자 당시 대표이사였던 손용기가 인수를 권유해 이훈동은 1953년 조선내화 대표이사에 취임하였다.
이훈동은 1963년 전남광업회 회장에 취임하여 이후 5선을 역임하였고, 1964년 상공회의소 회장에 취임하여 21년간 7선을 역임했다. 1967년 동일상역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로 선임되었다. 1978년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회갑 잔치 대신 뜻있는 사업을 구상하다가 ‘성옥문화재단’을 만들어 2018년까지 5만 3115명에게 80억 4000만 원의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1986년 조선내화주식회사 회장과 대한광업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87년 전남일보사를 설립하였다. 1993년 해남분체산업사를 설립하여 1998년에 한국분체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2003년 자녀들이 이훈동의 미수(米壽)를 기리기 위해 성옥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이훈동은 2010년 10월 30일 사망하였다.
이훈동이 설립한 주요 회사는 조선내화주식회사와 완도광산, 성산광산 등 4개 광산과 성옥산업 주식회사, 주식회사 대주기공, 주식회사 대한세라믹스, 주식회사 국분체, 주식회사 대한소결금속, 주식회사 삼한, 주식회사 전남일보, 주식회사 클럽900 골프장과 중국에 있는 영구광양내화재료유한공사, 산서오옥광양내산내화재료유한공사, 안산포항특종내화재료유한공사, 백작컨트리클럽 등이다. 이훈동은 고향인 해남군 황산면에 기부를 많이 하였는데, 황산주민자치센터 주변 시설물과 황산면 성산리 어민회관 건립, 황산면 청사 내 팔각정과 노인체력공원 조성 등에 후원을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이훈동의 저서로는 『나의 아침은 늘 새로웠다』(2007)가 있다.
[상훈과 추모]
이훈동은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상공부 장관 표창[1957], 대통령 특상 표창[1962], 상공부 장관 표창[1965], 대통령 표창[1978], 보건사회부 장관 표창[1980], 노동부 장관 표창[1982],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의장 표창[1983년] 등 7개의 표창, 동탑산업훈장[1974], 은탑산업훈장[1982], 새마을훈장 근면장[1983], 국민훈장 모란장[1984] 등 4개의 훈장과 상공부 우수업체상[1975], 제22회 인촌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