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6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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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中鉉 |
영어공식명칭 | Kim Joonghyun |
이칭/별칭 | 김성택(金聖澤),경집(景執),해은(海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변남주 |
출생 시기/일시 | 1844년 3월 18일 - 김중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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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82년 - 김중현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대피시킴 |
활동 시기/일시 | 1885년 - 김중현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86년 - 김중현 해남현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87년 - 김중현 영암군수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90년 - 김중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891년 - 김중현 전라도 병마절도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01년 - 김중현 중추원의관에 임용 |
몰년 시기/일시 | 1914년 09월 27일 - 김중현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9년 - 김중현을 모티프로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제작 |
출생지 |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상천리 -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상천리 |
부임|활동지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
부임|활동지 | 전라남도 영암군 |
묘소|단소 |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학동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광산 |
대표 관직 |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전라도 병마절도사|중추원 의관 |
[정의]
개항기 해남현감을 역임한 무신.
[개설]
김중현(金中鉉)[1844~1914]은 충청북도 제천 출신으로,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궁궐 밖으로 피신시키는 공을 세웠다. 해남현감으로 부임하여 해남과 인연을 맺은 뒤 1891년 부모의 묘를 해남으로 이장하였으며, 김중현 또한 사망한 뒤 해남군 옥천면에 묘소를 썼다.
[가계]
김중현의 본관은광산(光山)이다. 초명은 김성택(金聖澤)이고, 자는 경집(景執), 호는 해은(海隱)이다. 중현이라는 이름은 고종이 하사한 것이다. 아버지는 훈련판관(訓鍊判官)을 지낸 김재완(金在完)[1816~1846]이며 어머니는 박만철(朴萬哲)의 딸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부인은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활동 사항]
김중현은 세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장성한 뒤 상경하여 시구문 밖에서 유기공장을 운영하였다. 이후 궁궐에 납품을 하게 되어 궁궐을 자주 출입하다가 아버지의 음덕으로 궁궐 수문장이 되었다. 1882년(고종 19) 6월 9일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이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군인들을 앞세우고 궁궐을 침입하였고, 김중현은 명성황후를 누이라고 속여 등에 업고 궁궐 밖으로 피신시켰다. 이 일로 김중현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김중현은 1885년에는 무과에 급제하였고, 이듬해 해남현감에 제수되었다. 1887년 영암군수를 거쳐 1889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였으며, 1891년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1898년 김중현은 대한제국에서 품계가 정식으로 종2품에 올랐으며, 1901년(고종 38) 8월 5일에는 표훈원총재(表勳院惣裁) 민영환의 청으로 고종이 김중현에게 훈2등과 팔괘장(八卦章)[갑오개혁 이후에 문무관 가운데 훈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던 훈장]을 내렸다. 1901년 11월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되었다. 1907년(순종 1) 3월 20일에는 순종이 김중현을 훈1등에 서훈하고 팔괘장을 하사하였다. 김중현은 1914년 9월 27일 사망하였다.
[묘소]
김중현의 묘소는 해남군 옥천면 학동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중현은 1908년 대한제국 최고 훈장인 훈1등 팔괘장을 받았다. 2009년에 개봉된 김용균 감독의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군졸 김중현을 모티프로 만들어진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