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391 |
---|---|
한자 | 伏派館 |
영어공식명칭 | Bokpakwan Guesthous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동헌길 35-7[선두리 621]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변남주 |
건립 시기/일시 | 1440년 이후 - 복파관 건립 추정 |
---|---|
건립 시기/일시 | 1660년대 - 복파관 중창 |
소재지 | 복파관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동헌길 35-7[선두리 621] |
성격 | 객사 |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에 있던 조선시대 전라우수영의 객사.
[개설]
복파관은 전라우수영의 객사이다. 객사는 객관(客館)이라고도 하며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망궐례 등을 행하는 곳으로 우수영 관아 중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객사의 문은 운주루(運籌樓)였다. 복파관은 1440년 이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1660년대 중반 절도사 김동흘이 고쳐 지었으며, 1934년 폐허가 된 객사에서 기와를 수습하여 지은 집이 남아 있다.
[변천]
조선 시대에는 복파관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첫째 날]와 보름[15일]에 전라우수사의 주관 하에 관리들이 대궐을 향해 망궐례를 올렸다. 복파관은 임금의 명령을 받고 한양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사신은 복파관에 머물면서 교지(敎旨)를 전하기도 하였다. 복파관은 관아의 여러 건물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공간이므로 거대하게 지었다. 통영의 세병관이나 여수의 진남관이 수영의 객사이며 거대한 단일 건물이다.
복파관은 1440년 전라수영이 목포의 당포에서 옮겨 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건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후 1660년대 중반에 절도사 김동흘이 재직[1664년 3월~1665년 8월]하면서 고쳐 지었다다는 기록이 전한다. 복파관에 대한 기록은 조숙(曺淑)[1504~1582]의 『죽헌선생문집(竹軒先生文集)』, 이의승(李宜繩)[1665~1698]의 『원옹집(圓翁集)』에 나온다. 특히 김진상(金鎭商)[1684~1755]은 『퇴어당유고(退漁堂遺稿)』에서 “명량에서 돌아오는 길에 복파관에 도착하여 수사 성은석과 우후 김석후와 함께 활쏘는 것을 구경하였다[鳴梁歸路 到伏波舘 與水使成殷錫 虞侯金碩垕觀射].”라고 하였으며, 김이만(金履萬)[1683~1758]은 『학고집(鶴臯集)』에서 “복파관에서 절도사를 만났다[戊申八月 越一日日抵水營 謁節度使于伏波舘].라”고 기록하였다.
[위치]
1925년 발간된 『해남군지』에 복파관 객사는 현재 야소교당[우수영교회]이 자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전하는 말과도 같다. 일반적으로 객사는 동헌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야 하지만 전라우수영의 객사는 동헌의 아래에 위치하여 배치가 특이하다. 이처럼 배치가 반대인 이유는 전라우수영의 특성이 관방에 있으므로 조망이 좋은 곳에 동헌이 자리한 것으로 추측된다.
[현황]
복파관 객사 터는 우수영교회와 구 초등학교 석조 교실 인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석조 교실 부지와 교회 인근의 토지는 절토되었다. 우수영 교회의 예배당 아래쪽에 주춧돌이 남아 있다. 초등학교 아래 유충열 기와 폐가는 1934년 훼철된 객사 복파관의 기와를 재활용하여 지은 건물이다.
[의의와 평가]
복파관은 전라우수영의 핵심 건물이다. 현재 건물은 소실되었으나 터와 주변 환경은 보존되고 있으므로 발굴 조사를 거쳐 복원할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