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3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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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支院[驛院] |
영어공식명칭 | Samjiwon[Station Guesthous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변남주 |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에 있었던 옛 나루에 세워진 원(院).
[개설]
삼지원(三支院)은 진도와 해남 사이에 있는 명량해협의 동단을 가로 지르는 나루에 세워진 원이다. 해협의 뱃길 거리는 직선으로 약 3㎞에 이른다. 삼지원은 진도군을 왕래하는 중심 나루이자 진도군 관문에 해당하는 중요한 원이다. 삼지원은 벽파진~남리역으로 연결되는 역로 상에 있다. 해남 삼지원의 진도쪽 상대나루는 벽파진이다. 벽파진은 고려 때에 대진(大津)이라 칭하였다. 고려 대몽항쟁기에 삼지원에는 여몽연합군이 진을 설치하고, 벽파진에 있는 삼별초군과 대치하며 전투를 벌인 장소이다. 나룻가에 있는 원정(院亭)은 바람과 물때를 기다리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삼지원은 고려 때에도 진도군의 관문인 벽파진과 연결되었으며, 역로 상에 있었다. 즉, 삼지원은 진도군~벽파진~해남현의 삼지원~남리역~별진역으로 연결되었다.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新增)』,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의하면 “삼지원은 해남현 서쪽 60리[약 23.56㎞]에 있다.”라고 하였으나 『해남읍지(海南邑誌)』에서는 “현의 서쪽 40리[약 15.71㎞] 혹은 30리[약 11.78㎞]에 있다.”라고 하였다. 해남읍에서 직선으로 약 22㎞이므로 서쪽으로 60리가 옳다. 1872년 조선 후기 『지방도』를 보면 옥매산 아래에 삼지원이 그려져 있고 원정 그림과 60리[自官60里]가 표기되어 있다.
삼지원은 해남쪽에 있는 나루이며 벽파진은 상대 진도쪽 나루명이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진도군 기록에서는 “고려에서는 대진(大津)이라 칭하였다. 해남현의 삼지원(三枝院)과 통하는 큰 길[뱃길]이며, 관리 책임자는 수진장(守津將)이 한 사람이며, 10리[약 3.93㎞](서쪽) 우수영(右水營)으로 통한다.”라고 하였다. 『해남읍지』[1872]에서는 “삼지원은 현의 서쪽 40리에 있다[三支院在縣西四十里創院宇卽碧波津頭也].” 그리고 “현의 서남은 모두 바다이다. 벽파진은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진도와 군계이다. 양안 사이 피차의 바닷길이 모두 30리이다. 나룻가에 원관이 있다. 나룻배가 끊이지 않고 중류에 송도 승이도가 있는데, 혹 풍파를 만나면 이 섬들에 의지한다[海縣西南皆海 碧波津在縣南三十里 珍島郡界 兩岸之間彼此海程皆十里程 津頭有院官 船津船往來絡繹 中流有松島鼎島或值風彼不順依於此等島].”라고 하였다.
[내용]
삼지원 지명은 해남에서 우수영으로 가는 길에서 갈려서 진도 가는 곳, 즉 삼거리에는 있는 원(院)이라는 의미이다. 삼지원의 지명은 고려 때와 조선 때가 다르고 한자 표기도 다양하다.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삼견원(三堅院), 조선시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삼기원(三岐院), 『대동지지』에서는 삼지원(三枝院), 『해남읍지』[1872]에서는 삼지원(三支院)으로 표기하였다.
『고려사』를 보면 삼별초 항쟁 시 여몽연합군의 김방경은 아해(阿海)와 삼지원에 진을 쳤다. 당시에는 삼견원(三堅院)이라 칭하였으며, 삼지원과 벽파진은 서로의 상황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던 듯하다. 『고려사』 1270년(원종 11) 11월의 상황으로 김방경 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김방경(金方慶)[1212~1300]이 아해와 함께 삼견원(三堅院)에 주둔해 진도를 마주보고 진을 쳤다. 적은 약탈해 온 함선(艦船)에 모두 괴수를 그려 넣어, 온 바다를 뒤덮은 함선들의 그림자가 물에 비치면 마치 날아오르는 것처럼 움직여 그 기세를 당할 수가 없었다. 싸울 때마다 적군은 먼저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돌진해 와, 여러 날을 서로 겨루었지만 승패를 가리기가 어려웠다[方慶與阿海, 屯三堅院, 對珍島而陣. 賊於所掠船艦, 皆畫怪獸, 蔽江照水, 動轉如飛, 勢不能當. 每戰, 賊軍先鼓譟突進, 互勝負, 曠日相持].”
[변천]
삼지원은 고려시대에도 있었으며, 진도를 오가는 관리들이 바람을 기다리는 숙소로 원정이 세워졌는데, 원정은 『1872년 지방지도』로 보아 20세기 초까지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의의와 평가]
삼지원은 진도의 관문인 벽파진과 통하는 나루에 세워진 원이다. 조선시대에는 관리들의 숙소인 원정이 있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여몽연합군이 진을 펼친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