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3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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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驛院 |
영어공식명칭 | Inn for Government Officials or Missionarie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변남주 |
[정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개성이나 한양을 연결하였던 교통 및 통신 제도.
[개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벼슬아치가 이동하거나 공문을 전달할 때 마필(馬匹)이나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일을 보던 곳을 역(驛)이라 하고,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 숙소를 원(院)이라 하였다. 이를 합하여 역원(驛院)이라 칭한다. 이칭 역참(驛站)이라고도 하였다. 고려시대 해남군 지역에는 3개의 역이 설치되었다. 해남현(海南縣)에는 녹산역(祿山驛), 죽산현(竹山縣)에는 별진역(別珍驛), 황원군(黃原郡)에는 남리역(南利驛)이 설치되었다가 남리역은 고려 말에 왜구로 인하여 잠시 폐지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다시 3역이 설치되었다. 여기에 원(院)도 운영되었다. 적량원(赤良院), 만희원(萬喜院), 남리원은 육로상에 조선 전기에 설치되어 17세기 무렵까지 운영되었고, 해로상에는 등산원(登山院), 삼지원(三枝院)이 설치되어 조선 말까지 운영되었다.
[내용]
우리나라의 역원 제도는 삼국시대 신라 487년(소지왕 9)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한 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전국의 도로를 대, 중, 소로 나누고, 병부에 소속된 역승(驛丞), 역장(驛長), 역정(驛丁)을 두어 운영하면서 역마(驛馬)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제도에 더하여 1457년(세조 3)에 역승을 찰방(察訪)으로 고치고, 전국에 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원의 경우에는 고려시대 승려나 불교 신도들이 요로(要路)에서 가난한 여행자와 병든 사람들에게 숙식과 약품을 제공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선시대에 원은 대개 11.78㎞[30리]에 하나씩 두었다. 원은 원이 소재한 도로의 대소에 따라 지급되는 원위전(院位田)을 통하여 운영되었다. 그러나 원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면서 16세기 전후 공무 여행자의 숙식을 각 고을의 객사(客舍)나 역에서 맡거나 민간 위탁으로 대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원은 전국적으로 1,310개소가 있었다.
고려~조선 시대 주요 도로에는 대략 30리마다 하나씩, 전국적으로 500여 개의 역이 있었다. 나랏일 때문에 여행길에 오른 관리들은 마패를 제시한 다음, 말을 이용하였다. 역에서 일하는 관리들은 중요한 공문은 물론이고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이나 지방에서 걷은 세금을 운반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22개 역도(驛道) 중 하나인 승라주도(昇羅州道)는 30개소의 역을 청암(靑巖)[羅州]에서 관할하였다. 승라주도의 역도는 나주에서부터 북쪽으로는 광주와 장성을 지나 노령과 연결되고 서쪽과 남쪽으로는 바다와 연결되며 동쪽으로는 승평을 지나 남원도 및 산남도와 연결된다. 지금의 해남 지역에는 3개의 역, 해남현의 녹산(綠山), 죽산현의 별진(別珍), 화원군(黃原郡)의 남리(南里)가 있었다. 조선 초기의 역제(驛制)는 큰 변화 없이 고려의 역도 체계를 계승하였다. 역도는 도로의 상태와 중요도 및 산천의 거리에 따라 여러 개의 역을 묶어 찰방(察訪)[종6품]이나 역승(驛丞)[종9품]을 두어 지휘 감독하게 하였다. 세종 때 전국적인 규모의 도로망을 조직하여 44개의 역도에 538개의 역을 설치하였다. 전국의 각 역에는 찰방, 역승의 관장 아래 역장(驛長), 역리(驛吏), 역졸(驛卒) 등을 두어 역정(驛政)의 관리와 공역을 맡게 하였다. 그러나 역로를 관리하는 역승의 폐단이 심해지자 1535년(중종 30) 역승을 없애고 찰방만을 두어 조선 후기까지 이어지도록 하였다. 1887년(고종 24) 근대적 통신제도인 우사(郵舍)가 각 역을 중심으로 신설되어 역원제도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관련 기록]
해남군 지역의 역원에 대한 기록은 여러 곳에서 등장한다. 요점을 간략하게 기록 순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고려시대 승라주도 중에서 해남군 지역은 옛 고을에 1개씩, 해남현의 녹산역, 죽산현의 별진역, 황원군의 남리역이 설치되었다. 승라주도의 역 중에서 해남군 지역을 벗어나 한양을 갈 때 거치는 역만 언급하면, 영암의 영보역(永保驛)~남평의 오림역(烏林驛)~나주의 청암역(靑嚴驛)~광산의 선암역(仙嚴驛)~장성의 단암역(丹嚴驛)을 거쳐 노령을 넘는다.
2.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해진군 조에 “역(驛)이 2이니, 녹산·별진이요.”라고 하였고, 이어 영암군 조에는 “역이 1이니, 영보(永保)요, 옛날에는 남리역이 있었는데, 왜구로 인하여 없어졌다.”라고 하였다.
3.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역원 조에 따르면, 녹산역은 현의 남쪽 5리[약 1.96㎞]에 있다. 남리역은 현의 서쪽 35리[약 13.75㎞]에 있다. 별진역은 현의 북쪽 30리[약 11.78㎞]에 있다. 만희원(萬喜院)은 현의 서쪽 12리[약 4.71㎞]에 있다. 적량원(赤良院)은 현의 서쪽 23리[약 9.03㎞]에 있다. 삼기원(三岐院)은 현의 서쪽 60리[약 23.56㎞]에 있다.
4. 『세조실록(世祖實錄)』 1462년(세조 8) 8월 기사에 따르면 병조의 건의로 각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하여 찰방과 역승을 두었는데, 이때 남리역은 정비 복설되어 벽사도에 추가되었다. 따라서 해남의 남리역은 벽사역(碧沙驛)·진원역(鎭原驛)·통로역(通路驛)·별진역(別珍驛)·녹산역(祿山驛)·가신역(可申驛)·파청역(波淸驛)·양강역(陽江驛)·낙승역(樂昇驛) 등 10역과 함께 벽사도(碧沙道)에 편성되었다.
5.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의 기사는 위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과 일치한다.
6.『여지도서(輿地圖書)』에 해남 지역 3역의 구성원과 말에 대한 기록이 유일하게 등장한다. 원은 남리원, 삼지원, 완도원, 등산원이 등장한다[別珍驛 在縣北三十里 吏十 奴二十 馬十匹 綠山驛在縣南五里 吏十 奴二十 馬十匹 南利驛在縣西四十里 吏十五 奴二十 馬十匹俱屬碧沙驛 南利院在縣西四十里 三枝院在縣西五十里 莞島院在縣南七十里 登山院在縣北一百十里]. 그런데 만희원과 적량원은 폐지되었는지 기록에 없다.
7. 『대동지지(大東地誌)』는 역원에 대한 기록이 없고, 『해남읍지(海南邑誌)』에서는 3역은 폐지되었으며, 원에서는 적량원과 삼지원이 등장하는데 적량원은 폐지되고 삼지원은 유지가 되고 있다[今爲廢址 鹿山驛在縣南五里 南利驛在縣西三十五里 别珍驛在縣北三十里 赤良院在縣西二十三里今廢 三支院在縣西四十里創院宇卽碧波津頭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