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3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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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代 |
영어공식명칭 | Ancient Tim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고대/삼국 시대/백제,고대/남북국 시대/통일신라 |
집필자 | 변남주 |
[정의]
초기 국가 시대부터 남북국시대까지 전라남도 해남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해남 지역의 고대 역사는 우리나라 일반적인 고대 역사와는 다르게 전개되었다. 특히 삼국 시기는 일치하지 않는다. 서남단 변방에 위치하여 중앙과는 다르게 전개된 것이다. 해남 고대 역사 문화 형성은 고대 연안 해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해남 고대사회 소국의 명칭은 3세기 후반에 신미국(新彌國), 4세기 후반에 침미다례(忱彌多禮), 6세기 초반에 그려진 『양직공도(梁職貢圖)』에 등장하는 지미(止迷), 통일신라 시기에는 침명현(浸溟縣)인데, 조선시대에 객사의 이름이 침명관(浸溟館)으로 전개되어 그 전통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해남 지역 고대사회의 관련 유적 특징]
해남 지역 고대사회의 전반적인 면모는 지난 30여 년간, 총 20건의 고고 조사로 인하여 개략이나마 엿볼 수 있게 되었다. 고고학으로 살펴본 해남 지역 고대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은, 고대 유적의 밀도가 동부권 해남반도에서는 매우 높게 나타나나 서부권의 화원반도와 산이반도는 매우 빈약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해남 고대사회의 유적 분포 현황을 살펴보면, 바다를 중심으로 3대권, 즉 백포만권, 해창만권, 북일 연안권으로 나누어진다. 권역별 특징을 살펴보면, 백포만권은 철기시대의 조개무지 유적이 중심이며 다수의 성곽과 고분이 분포한다. 해창만권은 옹관고분이 주로 분포하며 옥녀봉 토성, 그리고 용두리 전방후원형 고분이 분포한다. 마지막으로 북일 연안권은 전방후원형 고분 등 다양한 형태의 고총 고분과 성곽이 중심을 이룬다. 그런데 이런 해남반도 고대사회의 3개권을 백제 시기의 3현(三縣) 소재지, 즉 새금현(塞琴縣)[현산면 고현리], 황술현(黃述縣)[문내면 고당리], 고서이현(古西伊縣)[마산면 화내리와 장촌리]과 견주어 보면, 백포만의 경우는 어느 정도 일치하지만 해창만과 북일 연안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이를 감안하여 삼국시대 또는 백제시대라는 시대 구분을 해남 지역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 주요 고고 유적에 따라 ‘패총 중심 사회’, ‘옹관 중심 사회’, ‘고분 중심 사회’로 나눌 수 있다.
[해남반도 고대사회의 변화]
해남반도에서 고대사회의 형성과 전개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① 백포만 고대사회의 중심세력 이동은 다음과 같다. 철기시대에는 군곡리를 중심으로 해안에 패총(貝塚)[조개무지] 중심 사회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4세기에서 5세기 중반까지는 현산천으로 중심지가 이동되어 옹관 사회가, 5세기 말 들어서 조산천 고분 중심 사회가 전개되었다. 6세기 중반 들어 다시 현산천 유역으로 이동되어 백제의 새금현의 읍치와 일치하게 되었다. ② 해창만 고대사회의 중심 세력 이동은 다음과 같다. 패총 사회에는 아주 미약하였다. 그러다가 3~5세기 전반에 옥녀봉을 중심으로 삼산천 유역에 옹관 중심 사회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5세기 후반 외부의 해양세력인 용두리 전방후원형 세력으로 교체되고, 주도권이 넘어갔다. 6세기 전반에 중심지마저 옥천면으로 이동되어 고분 중심 사회가 전개되었다. 6세기 중반 들어 마산면으로 다시 중심지가 이동되어, 백제 고서이현의 읍치가 되었다. ③ 북일 연안 고대사회의 세력은 4세기까지는 미약하였으나 5세기 후반 들어 새롭게 부상한 지역이다. 이점은 백포만과 해창만 세력과는 크게 다른 양상이다. 중심 시기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까지로 약 60년이다. 6세기 중반 들어 백제는 해남반도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세력판도를 무시하고, 3개의 반도를 중심으로 새롭게 지방을 편성하였다. 따라서 북일 연안 고대사회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해남반도 고대사회의 성격]
① 백포만 고대사회는 패총 중심 사회에서 고분 중심 사회까지 연안 항로를 통하여 중국[낙랑·대방], 가야, 왜, 탐라 등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였다. 동북아 연안 항로에서 중요한 무역항의 역할을 하여 ‘백포만 국제 포구 도시’라 칭할 수 있다. ② 해창만 고대사회는 옹관 중심 사회이다. 옥녀봉 산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독특한 대형 옹관 양식을 지니고 있다. 말 대신에 배를 이용하여 대외교류를 하였는데 변한의 철정 등을 수입하였다. 용두리·옥천 고분을 축조한 세력은 해양 세력이었으며, 가야, 신라, 왜 등과 활발한 대외 교류를 하였다. ③ 북일 연안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의 성격은 대부분 왜의 영향을 받았다. 반면에 백제계의 영향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북일 고대 세력은 해양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신미제국의 중심 해남 침미다례]
서복의 동래로 인하여 한국에는 철기문화가, 일본에는 철기와 벼농사 등의 문명이 전해졌다고 이해한다. 3세기 후반, 『진서』에 등장하는 신미제국(新彌諸國)에는 백포만, 해창만의 소국이 소속되어 있었을 것이다. 신미제국은 연안 해로를 통하여 중국[진(晉)나라]에 사신을 10여 차례 보냈다. 또 4세기 후반 들어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침미다례(忱彌多禮)는 백포만 또는 해창만으로 비정되고 있다. 400년 전후하여 옹관묘가 사라지고 난 후 100여 년 가까이 해남에서 수장급 고분이 찾아지지 않는다. 5세기 말 외래계인 해남 월송리 조산 고분이나 전방후원형 고분이 등장하기까지가 공백인 것이다.『일본서기』에 언급된 침미다례의 도륙 사건[369년]에 이어서 침미다례 등 땅을 빼앗은 사건[397년]과 해남 지역 ‘옹관 고분 사회’의 소멸은 시기적으로 일치하고 있어 주목된다. 서기 500년을 전후하여 60여 년간, 북일 연안에 새로운 세력이 자리를 잡았다. 당시 전라도 지역에서는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고, 해양성을 지녔으며, 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를 『양직공도』에 등장하는 ‘지미(止迷)’로 본다. 해남 고대사회는 해양을 통한 국제 교류가 활발하였다. 기원 전후에 시작되어 6세기 전반 무렵까지가 두드러진다. 국제 교류 대상은 중국, 가야, 왜, 탐라 등으로 다국적이다. 패총 중심 사회는 백포만에, 옹관 중심 사회는 해창만에, 고분 중심 사회는 북일 연안에 국제 교류의 거점이 형성되었다.
[통일신라 침명현과 조선의 침명관]
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해남반도 고대사회의 백제 시기가 펼쳐진다. 해남 지역에 백제 3현(三縣)이 설치되었다. 새금현은 해남반도의 현산면 고현리에, 황술현이 화원반도 문내면 고당리에, 고서이현이 산이반도와 해남반도의 일부를 아울러 마산면 화내리·장촌리에 치소를 두었다. 그러나 백제는 660년에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3년 간 치열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이마저 실패하고 말았다. 676년 신라에 의하여 삼국이 통일되고 경덕왕[재위 742~765]은 고유의 지명을 중국식으로 한자화하게 되었다. 이때 고현리의 새금현은 침명현(浸溟縣)으로 바뀐다. 여기에서 침명은 침미다례의 침미와 유사음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통일신라 침명현은 고려에 들어와 940년(태조 23)에 지금의 이름인 해남현으로 바뀌게 되지만 조선에 들어와 해남현의 객사 이름을 침명관(浸溟館)으로 하여 침미다례의 전통성을 이름으로 이어 갔다.
[의의와 평가]
고대 해남 지역은 해양을 통한 국제 교류가 활발했다. 다양한 고고자료의 축적으로 국제적인 해남 고대사회의 문화를 한걸음 더 복원하는 것은 해남 지역의 국제 해양성 회복의 길이다. 해남 고대사회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