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2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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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倉 |
영어공식명칭 | Haechang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해창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변남주 |
비정 지역 | 해창 -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해창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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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포구 |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해창리에 있었던 조선 후기 포구.
[개설]
해창(海倉)은 조선 후기에 해남현의 전세를 보관하고 출발하는 포구였으나 사실상 해남현의 관문 역할을 하였다. 전세나 대동미를 싣고 한양으로 출발하였다. 17세기 중반에 대동법을 실시하게 되면서 해남현에 설치한 세곡 창고였고, 동시에 세곡을 싣고 한양으로 출발하는 포구이기도 하였다. 전세와 대동미를 2월에 받아들여 3월에 배에 싣고 출발하여 한양의 서강에 바쳤다.
매년 음력 1월 14일 마을 뒤 당산에서 산신제와 용왕에게 해신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중단되었다. 해창의 흔적을 보여 주는 3개의 비가 포구 주변에 있다. 하나는 신선생 백파 소요대(申先生白坡逍遙臺) 비로 1880년(광서 6) 3월에 세워졌고, 다른 하나는 해남군수를 지낸 이용우 선정비(李溶愚善政碑)로 1903년에 건립되었다. 마지막 하나는 음각문이 마멸되어 내용을 알 수 없으나 1884년(광서 10)에 건립된 것이다.
[명칭 유래]
조선 후기 대동법의 실시로 연안 지역에 설치된 해창에서 지명이 유래하였다.
[형성 및 변천]
해남에서 남쪽으로 25리[약 9.82㎞] 떨어진 연곡리 고어란포[구룡포]가 구 해창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다가 지금의 해창리로 옮겨 온 것이라 한다. 해창은 해남의 관문 역할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도정 공장이 일인 시전(市田)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며, 목포~부산 간 발동기 여객선이 중간 기착하기도 하였다. 1988년 고천암 제방이 준공되면서 포구 기능을 상실하였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여지도서(輿地圖書)』, 『대동지지(大東地志)』, 『해남읍지(海南邑誌)』 등에서 모두 “해창은 현의 남쪽 20리[약 7.85㎞]에 있다[海倉在縣南二十里].”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화산면 해창리의 북쪽 해안을 가리킨다.
[관련 기록]
정온(鄭蘊)[1569~1641]이 쓴 『동계집』에 의하면 정온은 1614년(광해군 6) 7월 제주로 귀양을 갈 때 해남에서 출발하여 제주도 별도진에 이르렀다. 어란관(於蘭館)과 해창(海倉)에 머무르다 배를 타고 금도(金島)[화산면 명금마을 앞에 있는 작은 섬]에 이르렀다가 역풍을 만나 다시 해창에 정박하였다. 하지만 이때는 1658년 전라도에 대동법이 실시되고 해창이 설치되기 이전이므로 이때의 해창은 고어란을 일컫는 듯하다.
『여지도서』에 “전세(田稅)를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 2월에 받아들여 3월에 배에 실어서 한양의 서강에 바쳤다[田稅二月收捧 于海倉三月裝 發自本縣海倉 古作島 歷安興通津 江華楊川達于西江 十七日程].”라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