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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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安訥 |
이칭/별칭 | 자민(子敏),동악(東岳, 東嶽),동곡(東谷),동엄(東广),문혜(文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향주 |
출생 시기/일시 | 1571년 - 이안눌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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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88년 - 이안눌 진사시 장원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637년 - 이안눌 졸 |
추모 시기/일시 | 1637년 - 이안눌 좌찬성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663년 - 이안눌 문혜(文惠) 시호 받음 |
거주|이주지 | 이안눌 거주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
묘소|단소 | 이안눌 묘소 - 충청남도 당진시 |
사당|배향지 | 구산 서원 - 전라남도 담양군 수북면 남산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덕수(德水) |
대표 관직 | 예조판서 |
[정의]
조선 후기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서 부모의 삼년상을 치르고 이곳에 별서(別墅)를 두었던 문신.
[가계]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東嶽]·동곡(東谷)·동엄(東广). 증조할아버지는 좌의정 이행(李荇)인데,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주도하여 추성위사협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協贊弘濟保翼功臣) 1등에 책록된 풍성 부원군(豊城府院君) 이기(李芑)의 동생이다. 할아버지는 이원정(李元禎)이며, 박은(朴誾)의 딸인 고령 박씨(高靈朴氏)를 배필로 맞이하여 진사 이형(李泂)을 낳았고, 이형은 이양(李崵)의 딸인 경주 이씨(慶州李氏)와 혼인하여 슬하에 이안겸(李安謙)·이안인(李安訒)·이안눌(李安訥)[1571~1637]과 딸 하나를 두었다. 이안눌은 이기의 손자인 이필(李泌)이 부인 능성 구씨(綾城具氏)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얻지 못하자 1582년(선조 15) 재종숙부(再從叔父)인 이필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이후 그는 장령 송승희(宋承禧)의 딸인 여산 송씨(礪山宋氏)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동종(同宗)의 조카인 이합(李柙)을 양자로 들였다.
[활동 사항]
이안눌은 18세가 되던 해인 1588년(선조 21) 진사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599년(선조 32)에는 정시에 응시하여 을과 1위로 이름을 올린 뒤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보임되었다. 이후 형조정랑·예조정랑 등을 지내고 1601년(선조 34)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진하사(進賀使) 정광적(鄭光積)을 따라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4년(선조 37) 양모(養母) 능성 구씨가 사망하자 지금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서 장사를 지내고 3년 동안 여묘를 살았다. 이 일대는 조선 후기까지 능성 구씨의 소유지였기 때문에 이안눌은 양부와 양모의 묘소를 이 지역에 마련하고 삼년상을 치렀으며, 양모인 능성 구씨로부터 토지를 상속받아 이곳에 별서(別墅)를 두고 자주 머물렀다.
상복을 벗은 후 동래 부사·담양 부사·예조 참판 등을 지냈고, 1624년(인조 2)에는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아 경성부(鏡城府)에 유배를 갔다가 1627년(인조 5) 사면되었다. 이듬해 강화 유수로 부임하였다가 서울로 돌아온 뒤 형조참판·예조판서 등의 관직을 제수 받았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동악집(東岳集)』이 있다.
[묘소]
묘는 이안눌이 사망한 다음 달인 1637년(인조 15) 윤4월 충청도 해미현 모산리, 곧 지금의 충청남도 당진시에 마련되었다.
[상훈과 추모]
사망한 후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1636년(인조 14) 청백리(淸白吏)로 뽑혀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1663년(현종 3) 현종이 문혜(文惠)라는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