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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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柙 |
이칭/별칭 | 윤적(允迪),대산(臺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로 278-3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민아 |
출생 시기/일시 | 1624년 - 이합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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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57년 - 이합 알성 문과 병과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680년 - 이합 졸 |
묘소|단소 | 이합 묘소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9-1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덕수(德水) |
대표 관직 | 대사간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윤적(允迪), 호는 대산(臺山). 증조할아버지는 이원근(李元謹)이고, 할아버지는 이통(李通)이다. 아버지는 예조판서를 지낸 이경헌(李景憲)이며, 어머니는 충의위(忠義衛) 윤빙(尹聘)의 딸인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다. 이합(李柙)[1624~1680]은 이른 나이에 아버지의 명(命)으로 행예조판서 문혜공(文惠公)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양자가 되었다. 이합의 양모(養母)는 장령 송승희(宋承禧)의 딸인 여산 송씨(礪山宋氏)이다. 부인은 영의정으로 추증된 민성휘(閔聖徽)의 딸인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며, 후처는 현감 최후정(崔後定)의 딸인 완산 최씨(完山崔氏)이다. 슬하에 2남 4녀가 있다.
[활동 사항]
이합은 1646년(인조 24)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57년(효종 8)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소속되었다. 양아버지 이안눌(李安訥)의 음덕(蔭德)으로 6품으로 승진하여 성균관의 전적·사예·사성, 병조의 좌랑·정랑, 사헌부의 지평·장령·집의, 사간원의 정언·사간, 세자시강원의 필선·보덕·겸사서, 홍문관의 부수찬·수찬·부교리·교리·응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 후 상의원(尙衣院)·장악원(掌樂院)·사복시(司僕寺)의 정(正)을 지냈다. 또한 결성 현감·서천 군수를 지냈다. 1674년(숙종 즉위년) 능(陵)을 옮길 때 동역(董役)한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677년(숙종 3)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오기도 하였으며, 형조·호조·공조의 참의를 거쳐 승정원에 들어 좌승지에 이르렀다가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1674년 겨울 사간원 대사간으로 있을 때 갑인 예송(甲寅禮訟)[효종 비인 인선 왕후가 죽은 뒤 대왕대비 조씨의 상복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 전개되어 송시열(宋時烈)이 중죄를 입게 되었다. 이합이 대사간으로서 논의에 참여할 수 없다며 인피(引避)하자 임금이 “이 피하는 말의 뜻을 보건대 당(黨)을 두호하면서 공갈 협박하는 작태가 아닌 것이 없다.”며 진노하여 이합을 체직(遞職)하라고 명하였다. 이합은 이후 조정에서 배척당하였으나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 젊어서 집안의 형인 택당(澤堂) 이식(李植)에게 배워 서인계 학풍을 이어 갔다.
[묘소]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양주(楊州) 해등촌(海等村)[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임좌(壬坐) 언덕에 장례하였다. 우이 계곡에서 방학로를 따라 고갯길을 넘어서면 도로 왼쪽에 천주교 공원묘지가 있는데, 이합이 묻혀 있는 덕수 이씨 묘역은 공원묘지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묘역에는 이합의 묘가 가장 상단에 있고, 그 오른쪽 아래로 내려오면 이집(李㙫)의 묘, 그 아래 이주진(李周鎭)과 이은(李溵)의 묘가 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