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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사양리 유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526
한자 鎭川思陽里遺蹟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사양리|문백면 문덕리
시대 선사/선사,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박중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주거지|목탄요|요지|분묘|유적
건립시기/연도 선사시대~조선시대
소재지 주소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사양리|문백면 문덕리

[정의]

충청북도 문백면 사양리문덕리에 위치한 선사시대에서 조선시대 주거 및 분묘 유적.

[개설]

사양리 유적(思陽里 遺蹟)진천군 문백면 사양리·문덕리 일원에 전기·전자 농공단지를 조성하게 됨에 따라 조성부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유적이다. 유적의 입지는 해발 350.2m의 양천산에서 북쪽으로 뻗은 능선의 말단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해발 76m 내외의 낮은 구릉성 산지이다.

이 유적에서는 발굴조사 결과 주거지 8기, 목탄요 5기, 고려시대 석곽묘[돌덧널무덤] 5기, 고려~조선시대 토광묘[널무덤] 118기, 수혈유구 8기, 구상유구 3기, 소성유구 2기, 적석유구 1기 등 모두 150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유물은 토기·도기 120점, 금속류 146점, 옥석류 35점 등 모두 301점이 출토되었다.

[건립경위]

주거지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5기와 조선시대 주거지 3기가 조사되었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구릉 정상의 평탄부에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주거지의 입지는 청주 용암유적 등 인근의 같은 시기 주거지 입지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출토유물은 옹·발·홍도 등의 토기류와 돌화살촉·돌칼·숫돌·끌 등의 석기류가 있다.

토기류는 구연부가 이중구연+단사선문을 특징으로 하는 가락동식 토기가 주종을 이루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삼각점열문이 시문된 홍도와 구순각목토기 등 흔암리 유형의 토기 전통도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 주거지는 1기는 온돌시설만 남아 있고, 2기는 움집 형태로 한쪽 벽에 치우쳐 화덕시설을 갖추고 있다. 내부에서 출토된 조선시대 분청자 귀얄문편과 도기편으로 보아 대략 16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목탄요는 삼국시대 목탄요 4기와 조선시대 목탄요 1기가 있다. 삼국시대 목탄요는 최근 들어 고대부터 철 생산지로 유명한 충주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제철에 필요한 연료인 목탄의 생산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적과 가까운 위치에 4세기대의 제철 유적인 진천 석장리 유적이 위치하고 있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목탄요의 연대는 OSL 연대측정 결과 1호 목탄요는 A.D. 300±100, 2호 목탄요는 260±80으로 나와, 대체로 3세기에서 4세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5호 목탄요는 구조 및 형태상 갈월리 유적의 조선시대 목탄요와 유사한 것으로 보아 18세기 이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석곽묘는 무덤구덩이를 굴광한 후 할석을 이용하여 석곽을 만들었다. 석곽 내에는 5호를 제외한 1~4호에서 관못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목관을 안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잔존 상태는 1호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면 아래쪽의 단벽이 유실되었다. 유물은 1호에서만 발형토기, 청자 광구병 조각이 출토되었을 뿐이다.

토광묘는 청자대접과 접시, 청동숟가락이 출토된 75호만이 고려시대에 조영된 것으로 보이며, 나머지 117기는 조선시대 이후에 조영된 것이다. 토광묘에서 출토된 유물은 자기류 12점, 청동기류 27점, 철기류 77점, 구슬 5점 등이 있다. 자기류는 청자대접과 접시가 각 1점, 백자대접 5점, 백자접시 3점, 백자종지 1점, 흑유병 1점이 출토되었다.

청동기류는 청동숟가락이 21점으로 가장 많고, 청동방울 3점, 경식 1점, 머리뒤꽂이 1점, 동전 1점이 출토되었다. 철기류는 관못이 72점으로 가장 많고, 손칼 2점, 낫 1점, 용도 미상의 철기 2점이 출토되었다. 수혈유구는 정확한 시대나 유구의 성격을 알 수 없으며, 6호에서만 백자접시와 저부편, 토기편이 출토되어 조선시대 것임을 알 수 있다.

[위치]

사양리 유적문백전기전자농공단지 내에 있다. 진천군 진천읍소재지에서 진천 농다리 쪽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다 신정교를 지나자마자 바로 길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형태]

청동기시대 주거지의 형태는 비교적 잔존 상태가 양호한 3호 주거지의 경우 평면비가 1.7:1로 장방형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4호 주거지의 경우는 평면비가 2.25:1로 세장방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 내부시설로는 불땐자리, 초석, 저장시설이 있다. 노지는 모든 주거지에서 1기 혹은 2기의 불뗀자리 가장자리로 ‘ㅁ’자형 혹은 ‘ㄷ’자형으로 돌을 돌린 위석식 노지가 확인되었다.

초석은 대개 주거지의 장축 방향을 따라 2열의 초석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판단되며, 초석의 설치 방법에 따라 바닥면 위에 놓은 경우, 구덩이를 파고 초석을 놓은 경우, 두 가지를 혼용한 경우로 구분된다. 저장시설은 4호 주거지에서만 확인되었는데, 모서리 부분에 방형 혹은 부정형으로 주거지의 바닥을 파서 만들었다. 주거지의 크기는 가장 양호하게 남아 있는 4호의 경우 길이 1,260㎝, 너비 560㎝, 최대 깊이 78㎝이다.

삼국시대 목탄요의 구조와 형태는 가장 잔존 상태가 양호한 2호를 통해 보면 기반암 풍화토를 굴착하여 만들었으며, 전면작업장·점화부·탄화실·굴뚝이 사면의 경사 방향과 직교하게 일직선상을 이루고 있다. 탄화실의 사면 아래쪽으로는 42~60㎝ 너비의 8개의 측구(側口)가 같은 간격으로 시설되었으며, 그 아래로 측구와 연결된 측면작업장이 있다. 전면작업장에서 굴뚝까지의 전체 길이는 15.2m이다. 조선시대 목탄요는 점화부·탄화실·굴뚝의 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사면 아래쪽에 점화부가 위치하고, 사면 위쪽에 굴뚝이 위치해 있다.

탄화실의 평면 형태는 역삼각형이며, 굴뚝의 하단부가 구덩식으로 요상보다 깊게 굴착되어 있어 갈월리 유적의 목탄요 형태와 유사하다. 전체 길이는 4.0m이며, 탄화실의 퇴대너비는 2.46㎝이다. 고려시대 석곽묘는 평면 형태가 장방형이며, 장축 방향은 사면의 경사 방향과 나란하다. 크기는 길이를 알 수 있는 것은 1호뿐으로 길이가 227㎝이며, 너비는 대개 75~80㎝가 일반적이다.

토광묘는 모두 장방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 묘광의 굴광 방식은 단 없이 굴광한 것과 2단으로 굴광한 것으로 구분된다. 2단으로 굴광한 경우에는 모두 관못이 출토되지 않았으며, 유물도 42호를 제외하고는 모두 부장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6기 정도는 묘광 안에 회곽을 시설한 회곽묘이다. 유물의 부장 양상은 목관의 상부 혹은 목관 내에 부장하는 경우, 목관과 묘광 사이에 부장하는 경우, 묘광의 한쪽 장벽에 편방(偏房)[벽감]을 시설하여 부장하는 경우로 구분된다. 수혈유구는 대부분 장방형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7·8호만이 원형이다.

[현황]

118기에 달하는 고려~조선시대의 토광묘는 무덤의 구조, 출토유물을 통하여 당시 진천 지역에서 생활하였던 서민들의 장제 및 생활·문화상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한반도 중부 및 영남 내륙 지역의 청동기시대 전기 주거지의 특징적인 양상인 위석식 노지를 갖춘 장방형 주거지가 신월리 유적에서 조사됨으로 인해, 다른 지역과의 비교연구뿐만 아니라 진천 지역의 청동기시대 전기문화를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삼국시대 2호 목탄요는 형태와 구조가 양호하게 남아 있어 삼국시대 목관요 연구에 형태 및 구조상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도 될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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