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332
한자 義寧郡
영어음역 Uireong-gu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낙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1269년(원종 10년)연표보기
시행연도/일시 1269년(원종 10)
폐지연도/일시 1270년(원종 11년)연표보기

[정의]

고려 후기 충청북도 진천 지역의 행정구역 이름.

[개설]

1269년(원종 10)에 진천임씨인 임연(林衍)김준(金俊)을 제거하고 최고 집정자가 되자, 왕이 임연의 고향인 진주[창의현(彰義縣)]을 고쳐 의령군(義寧郡)으로 승격시켰다. 지방관으로 지의녕군사(知義寧郡事)를 두었다.

[관련기록]

『고려사(高麗史)』 권56, 지10 양광도 진주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259년(고종 46) 임연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창의(彰義)로 승격하고 현령(縣令)을 두었고, 1269년(원종 10) 또 임연의 고향이라 하여 지의녕군사(知義寧郡事)로 높였다가 임연이 주살된 이후 다시 낮추어 진주(鎭州)로 복구하였다. 별도로 상산(常山)이라고도 불렀다[高宗四十六年, 以林衍內鄕, 陞爲彰義縣, 置令, 元宗十年, 又以衍之故, 陞知義寧郡事, 及衍誅, 還降, 稱今名, 別號常山].”

[내용]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이 일어나 무신정권이 성립되었다. 그 후 초기 무신정권은 집정자가 자주 교체되는 등 상당히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최충헌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뒤 정권은 안정되어 4대 60여 년간 최씨 정권이 유지되었다.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정자인 최의(崔竩)는 집권 후 전횡으로 인심을 크게 잃었다. 대사성 유경(柳璥), 별장(別將) 김준, 도령낭장(都領郎將) 임연 등이 최의의 집을 습격하여 그 일당을 제거함으로써 최씨 정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때 공을 세운 대가로 임연의 고향인 진주창의현(彰義縣)으로 승격시켰다. 그 후 김준원종과 사이가 나빠져 갈등을 보이면서 임연과도 틈이 벌어졌다. 결국 김준임연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권력이 임연에게로 돌아갔다. 국왕인 원종김준 제거에 공을 세운 임연을 위하여 그의 내향인 창의현의령군(義寧郡)으로 올려주었다.

그러나 원종임연의 사이가 나빠지면서 임연원종을 폐하고 왕제(王弟)인 안경공(安慶公) 창(滄)을 옹립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원에 가 있었던 태자의 중재로 원종이 복위하였으나, 원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려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동녕부가 설치되는 등 몽고의 세력이 강해지자 임연은 불안한 상황에서 병으로 죽었다. 그 후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집권하였으나 왕의 측근세력에 의해 피살됨으로써 무신정권이 막을 내렸고, 의령군도 다시 진주로 바뀌었다.

[변천]

고려 초 강주(降州)라고 불리다가 뒤에 진주로 고쳐졌다. 무신정권 말기 김준최의를 제거하고 집정자가 되었을 때 임연이 공을 세우자 그 대가로 진주창의현으로 승격시키고 현령(縣令)을 두었다. 1269년에 임연김준을 제거하고 최고 집정자의 지위에 오르자 창의현을 고쳐 의령군으로 삼았다. 임연이 죽자 다시 의령군진주로 바꾸었다.

[의의와 평가]

진천 출신의 인물인 임연이 최고 집정자의 지위에 오름으로써 그의 내향도 의령군으로 읍호가 상승하였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진천이 집정자의 고향으로서 정치적 위상이 그에 걸맞게 상승하였으며, 중앙에 진천의 존재가 크게 알려졌다는 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