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916 |
---|---|
한자 | 孝子林養文旌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용호리 427-2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고순영 |
건립 시기/일시 | 1904년 - 효자 임양문 정려 건립 |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37년 - 효자 임양문 정려 중수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1년 05월 31일 - 효자 임양문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5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효자 임양문 정려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5호 지정 |
문화재 해지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효자 임양문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5호 지정 해지 |
현 소재지 | 효자 임양문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용호리 427-2 |
원소재지 | 효자 임양문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용호리 427-2 |
성격 | 정려 |
양식 |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부안임씨 문중 |
관리자 | 부안임씨 문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5호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용호리에 있는 임양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개항기에 세운 정려.
[개설]
효자 임양문 정려는 부안임씨 임양문(林養文)[1744~1810]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임양문은 1744년(영조 20) 용호리에서 임시무(林時茂)와 정세평(鄭世枰)의 딸 진주정씨(晋州鄭氏)[1709~1782]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인 임양조(林養祚)와 함께 양친을 모시고 어렵게 살아가던 중 부친이 병으로 중태에 빠지자 엄동설한에 산약을 캐어 연명하게 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3년간 극진히 시묘살이를 하였다.
임양문은 1810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용호리 출동산 서쪽 기슭에 있다.
[위치]
효자 임양문 정려는 세종특별자치시에 있는 미호천을 지나 노적산 아래 5-3 생활권의 한누리대로 오른쪽 근린생활공원 부지 내에 있다.
옛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 용호리 상룡마을로, 당시 효자 임양문 정려는 마을 입구에 자리하였다. 현재 민가는 모두 이전되고 폐쇄되어 진입로도 없다.
[변천]
1866년 송능수(宋能洙), 조상규(趙尙奎) 등이 연기현감 조병익(趙秉翊)에게 글을 올려 명정(銘旌)[충·효·열을 행한 사람에게 나라에서 주는 최고의 포상]을 청하였으나 명정을 받지 못하였고, 고을 선비들이 다시 여러 차례 현감과 관찰사에게 글을 올렸으나 역시 명정을 받지 못하였다.
1904년에 이르러 원근의 선비들이 다시 관찰사 이건하(李乾夏)에게 등장(等狀)[여러 사람이 이름을 잇대어 써서 관청에 올려 하소연하거나 하소연하는 일]을 올리자 관찰사가 치하하고 군내 진사 장철상(張喆相) 등과 합쳐 장예원경(掌禮院卿) 조정희(趙定熙)에게 글을 올리니 조정희가 왕에게 보고하여 효자로 명정 받았다.
유인철(柳寅哲)이 지은 정려기에 의하면 1937년에 효자 임양문 정려를 중수하고 효자 임양문 정려 앞에 비석을 세웠다.
[형태]
효자 임양문 정려는 높게 석축하여 만든 대지 위에 돌계단을 놓고 세웠다.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시멘트의 방형 기단 위에 화강암재 팔각초석를 놓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다.
방풍판을 시설한 이익공 겹처마의 맞배지붕을 올렸고, 사면은 홍살로 처리하였다.
입구에는 철문을 달고, 효자 임양문 정려 주위에는 기와를 얹은 낮은 돌담을 쌓아 정려를 보호하고 있다.
[현황]
효자 임양문 정려 내부에는 명정현판이 걸려 있다. 명정현판[157×45㎝]에는 ‘孝子 扶安林公養文之閭 高宗四十一年 命旌’이라 하여 1904년(고종 41)에 명정 받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효자 임양문 정려 앞쪽에는 1937년에 유인철이 짓고 이석영(李錫永)이 쓴 정려기의 내용을 새긴 정려비[47×123×22㎝]가 세워져 있다.
효자 임양문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5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