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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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陳寔 |
영어공식명칭 | Jin Sik |
이칭/별칭 | 낙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반곡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안경희 |
[정의]
조선 전기 세종 지역의 여양진씨 세거에 영향을 미친 문신.
[개설]
진식(陳寔)[1519~1568]의 자는 낙이(樂而)로 평소 성격이 강직하고 기개가 높았던 인물이다.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여양진씨 문중의 진우(陳宇)와 진식 형제에게 이언적 등을 축출하는 옥사 사건에 대하여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협조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진우는 궁정 뜰에서 김안로 일파에게 참살(斬殺)[참혹하게 죽임]당하였고 진우의 아들들도 곧 밀어닥칠 화를 피하여 뿔뿔이 흩어져 은신하였다. 진우의 둘째 아들 진한번이 반곡리 마을로 피신하여 살게 되었고, 진씨(陳氏) 마을 중의 하나인 현 세종특별자치시 반곡동[옛 충청남도 연기군 금남면 반곡리]에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진식은 진우의 동생으로 여양진씨 가문의 선조(先祖)이다.
[가계]
진식의 본관(本貫)은 여양(驪陽)으로 진치중(陳致中)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진유(陳猷)이고, 아버지는 진사 진복명(陳福命)이다. 어머니는 판중추부사를 지낸 황진(黃璡)의 딸 창원황씨(昌原黃氏)이고 문인으로 이름을 떨친 진우(陳宇)가 진식의 형이다.
[활동 사항]
진식은 1547년(명종 2)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대교·정언·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으며, 1556년(명종 11)에는 병조정랑을 이듬해에는 검상·사인 등을 지내었다. 또한 1558년(명종 13)에는 내섬시부정(內贍寺副正), 1559년(명종 14)에는 전한 등을 지내었고 1560년(명종 15)에 형조참의를 거쳐 의주목사로 출보(出補)[중앙 관직에 있던 관리가 지방관직에 임명되어 나아감]되었다. 1563년(명종 18) 공조참의와 동부승지를 역임하였고 이듬해인 1564년(명종 19)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명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다녀온 후 이조참의가 되었다. 1566년(명종 21)에는 대사간·호조참의, 다음 해에는 병조참지·부제학을 지내고 치사(致仕)[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하였다.
평소 강직하여 당시의 권세가 김안로의 횡포에 맞서 김안로 일당을 탄핵하는 등 기개가 높았다. 진식의 형 진우가 김안로의 모함으로 죽임을 당하자 홀로 궁궐 밖에 엎드려 억울함을 상소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에게 진식의 높은 기개가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