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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한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574
한자 淸州韓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임선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552년(명종 7)연표보기 - 한우 출생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600년대연표보기 - 한필적 출생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632년(인조 10)연표보기 - 한우 사망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600년대연표보기 - 한필적 사망
본관 청주 - 충청북도 청주시 방서동
묘소|세장지 한충 묘소와 신도비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고복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봉암서원 터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봉암리 지도보기
성씨 시조 한란
입향 시조 한우|한필적

[정의]

한란을 시조로 하고 한우, 한필적을 각각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세종특별자치시의 청주한씨는 청주와 인접한 지역에서 터를 잡아 살고 있다.

정당공파(政堂公派)로 한충의 손자인 한우가 1600년대 초에 전동면 심중리에 입향하고, 문정공파(文靖公派)인 한필적이 동면 응암리에 입향하면서 정당공파와 문정공파들이 청주 지역에 다수 거주하고 있다.

[연원]

청주한씨 시조는 한란(韓蘭)[853~913]으로, 기자의 후예 우량의 32세손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정벌하기 위하여 청주를 지날 때 한란이 군량미를 보태 삼한 통합에 공(功)이 있었으므로 개국벽상공신으로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올랐다.

청주 방정리[방서동]에 세거하였기 때문에 후손들은 청주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를 이어 왔다.

[입향 경위]

세종특별자치시는 청주에 이웃하여 있는 조선시대의 연기현전의현으로 구성되어 있고, 일부 지역은 청주목 관할 지역이었기 때문에 청주한씨가 곳곳에서 살고 있다.

청주한씨 중 정당공파[한공연의 후손]와 문정공파[한계희의 후손] 후손들은 조선시대의 입향 유래 확인이 가능하다.

전동면 심중리에는 청주한씨 정당공파가 거주하고 있으며, 파조는 한공연(韓公衍)이다.

시조의 17세손인 송재(松齋) 문정공(文貞公) 한충(韓忠)[1486~1521]의 후손들이 세종특별자치시에 거주하고 있다. 한충은 청주 학곡리에서 태어났으나 연서면 고복리에 한충의 묘가 있다.

전동면 심중리[옛 청주 강외면 심중리]에는 한충의 손자인 한우(韓宇)[1551~1632]와 증손자인 한준민(韓俊敏)[1570~1638] 등이 묻혀 있으며, 한우의 배위(配位)[남편과 아내가 모두 죽었을 때 그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가 전의이씨라는 점에 비추어 보아 한우가 청주한씨 정당공파의 세종특별자치시 입향조로 추정된다.

연동면 응암리에는 청주한씨 문정공파가 거주하고 있다. 파조 한계희(韓繼禧)[1423~1482]는 한상경의 손자로, 1447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471년(성종 2)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2등에 책록(策錄)되었으며, 1478년 좌찬성에 이르렀다. 문정(文靖)은 한계희의 시호(諡號)[제왕이나 재상,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이다.

입향조는 한필적(韓必迪)[1600년대]으로, 시조의 20세손이다. 한필적의 아버지 한효삼이 당파 간의 갈등을 피하여 홍성군 결성으로 낙향하였다가 청원군 부용리[옛 공주 명탄]로 왔고, 이후 아들 한필적이 응암리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후손들은 명당을 찾아 응암리 높은정이에 은거(隱居)[세상을 피하여 숨어서 삶]하기 위하여 온 것으로 보고 있다.

청절한선생유허비(淸節韓先生遺墟碑)가 응암리 마을 입구에 있다. 청절(淸節)은 한필적의 호이다. 후손들은 이를 근거로 한필적을 입향조로 보고 있다.

[현황]

현재 청주한씨전의면 동교리, 조치원 번암리, 전동면 보덕리, 동면 응암리 등지에 거주하고 있다.

[관련 유적]

연서면 고복리에는 한충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고, 연서면 봉암리에는 조선시대 연기현에서는 유일하게 사액 받은 서원으로 한충·김장생·송준길·송시열을 병향(並享)[사당에 신주들을 같은 줄에 나란히 두어 함께 제사함]하던 곳인 봉암서원(鳳巖書院) 터가 있다. 봉암서원 터에는 봉암서원사적비(鳳巖書院事蹟碑)만 남아 있다.

전동면 심중리에는 청주한씨 재실(齋室)[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이 있다. 심중리에는 납골당을 만들기 전에는 청주한씨의 묘소가 많이 있었다. 원래 비석이 많아 비석산이라고 불린 청주한씨의 선산이었다.

2003년 전동면 심중리 선산에 납골묘를 세우기 위하여 이장하다가 조선 선조 때 영릉참봉(英陵參奉)을 지낸 한준민(韓俊敏)[1570~1638]과 한준민의 부인 여주민씨, 며느리 평양조씨의 유골이 미라 형태로 발견되었다. 함께 묻혀 있던 조선시대 복식도 출토되었다.

학계에서는 부부 합장 형태로 완벽하게 보존된 경우는 매우 드물어 합장묘 연구의 좋은 사료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시신을 감싸고 있던 옷은 조선 전기의 의상 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단국대학교에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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