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3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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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燕岐郡反託鬪爭委員會 |
이칭/별칭 | 연기군 반탁투위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상호 |
[정의]
1945년 12월 29일 조치원읍 공회당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단체를 조직한 사건.
[역사적 배경]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미·소 군정이 38도선을 경계로 각각 남과 북에서 실시되었다.
1945년 12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3국[미국, 영국, 소련] 외상 회의에서 연합국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여 공동 위원회와 임시 정부가 최고 5년간의 신탁 통치 협정을 맺을 것에 합의하였다. 또한 임시 민주 정부를 수립하고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2차 세계대전 내내 연합국 간 합의가 실패한 이유는 30년 신탁통치를 주장한 미국의 제안에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고 있던 영국과 민족주의를 내세운 소련이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
[경과]
1945년 12월 29일 임정요인(臨政要因) 신익희(申翼熙)[1894~1956]가 온양온천에서 조치원으로 와서 특별 강연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조치원 읍민들이 신익희의 강연을 듣기 위하여 조치원교동초등학교 교정에 모여들었다. 그때 ‘소련 측의 주장을 따라 우리나라를 5개국 관리하에 최고 5개년에 걸치는 신탁통치를 거쳐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키자’라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한국문제 결정 내용을 동아일보가 한국 최초로 보도하였다. 신익희는 급히 상경하면서 조치원 방문이 중지되었다.
지역의 유력 인사들은 조치원읍 공회당에 모여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단체로 ‘연기군 반탁투쟁위원회’를 조직한 후 반탁 전보를 발송하였다. 이는 서울보다 하루 빠른 시점이었다. 위원장은 맹의섭, 부위원장은 김정헌과 이모(李某)였다. 위원은 양정석, 최봉국, 이찬환, 박용덕 외 공산계열 인물들이 있었다.
연기군반탁투쟁위원회는 시내 곳곳에 ‘신탁통치 반대’ 벽보를 신속히 붙였다. 이튿날 오전 부위원장 이모와 그에 동조하는 위원은 사표를 제출하였다. 공산계열 위원들이 찬탁통지를 받은 모양인지 하룻밤이 지나자 ‘신탁통치 반대’라는 벽보 아래에 ‘반대’라는 두 글자를 써 놓았다. 언뜻 보면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반대한다’하여 ‘반대를 반대한다’는 것이어서 결국에는 신탁통치를 찬성한다는 것이 되어 멋도 모르고 반탁위원회 결성에 참가한 이모 등 공산계열 인사들은 하룻밤 사이에 노선을 변경하였다.
12월 31일 오후에 인민위원회 간부 전원이 소집되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와는 병행할 수 없음을 각자 설파하고 인민위원회를 해산하기로 제창하니 모두 찬성하였다. 그리고 즉석에서 해산을 선언하고 각 진영은 몇 곳에 벽보로 성명하였다. 차후 인민위원회를 부활시키려는 공산계열의 타협안과 위협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군정책임자 존 하지 중장의 대 공산당 유화정책으로 조치원의 우익 세력은 곤란함이 적지 않았다.
[결과]
좌익 세력은 처음에는 신탁통치를 반대하였으나 임시정부 수립이 독립의 지름길이라고 판단하고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에 찬성하였다. 김구를 비롯한 우익 세력이 1946년 1월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 위원회’를 결성하자 연기군의 우익세력도 신탁통치반대 운동에 나섰다. 이에 좌익 세력과 우익 세력은 신탁통치 찬반으로 극심하게 대결했다. 또한 신탁통치에 조심스럽게 찬성 입장을 표명한 한국민주당의 송진우가 1945년 12월 30일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