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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356
한자 烽燧
영어공식명칭 Signal Fire
이칭/별칭 봉화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해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46년(세종 28) - 봉수법 제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47년(세종 29) 3월 - 연변연대와 복리봉화[내지봉화]를 동시에 설치하는 제도 확립
성격 통신 시설

[정의]

조선시대 지역에서 긴급한 상황을 중앙에 전하던 군사 통신 시설.

[개설]

전통 시대의 통신 시설로 밤에는 횃불을 올리고 낮에는 연기를 이용하여 산봉우리에서 산봉우리로 신호를 보내 변경의 위급을 중앙에 통보하였다. 세종특별자치시 지역에는 용수산(龍帥山) 봉수가 있었다.

[봉수제도]

봉수(烽燧)는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을 말한다. 봉(烽)[불]과 수(燧)[연기]로 신호를 보내는 것은 우역제(郵驛制)와 더불어 전통시대의 보편적인 통신 방법이었다. 역마(驛馬)나 인편(人便)보다 시간이 단축되었고, 신속한 효용성을 발휘하여 지방의 급변하는 민정 상황이나 국경 지대 적의 동태를 중앙에 보고한 연락체계였다.

1446년(세종 28) 봉수법이 제정되었고, 봉수대의 시설 기준 및 봉군(烽軍)의 신분과 봉화 홰의 수를 새로 정하였으며, 봉수의 노선을 5개로 나누어 정하는 등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이듬해인 1447년 3월에는 연변연대(沿邊煙臺)와 복리봉화(腹裏烽火)[내지봉화(內地烽燧)]를 동시에 설치하는 제도가 확립되었다.

이에 따르면 연변봉수(沿邊烽燧)의 연대는 높이 7.8m[25척], 둘레 약 21.8m[70척], 직경 6.95m였다. 연대 밑의 사면은 9.1m[30척]로 하였다. 외부의 참호 깊이와 넓이는 각기 3.1m[10척], 둘레는 약 100m로 하였다. 모두 영조척(營造尺)을 사용하게 하였다. 또한 갱참(坑塹)[깊고 길게 파 놓은 구덩이]의 외면에 껍질을 깎아 뾰족하게 다듬은 길이 0.91m[3척]의 나무 말뚝을 심었다. 넓이는 3.1m[10척]이 되게 하였다.

연대 위에는 가옥(假屋)[임시로 지은 집]을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사용하는 물과 불을 담는 그릇, 병기 등의 물건을 간수하게 하였다. 망 보는 사람은 10일 동안 서로 번갈아 지키게 하고, 새로 오는 사람과 그전에 있던 사람 사이에 양식이 떨어질 때는 해당 고을 관원과 감사(監司), 절제사가 적당히 모자라는 것을 보충해 주도록 하였다.

[세종시의 봉수]

조선의 봉수 제도는 노선에 따라 직봉(直烽)과 간봉(間烽)으로 구분하고 성격에 따라 다시 경봉수(京烽燧), 내지봉수(內地烽燧), 연변봉수(沿邊烽燧)로 구분하였다. 이밖에 연변 지역에서 수군진이나 각 고을에서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서 운영한 권설봉수(權設烽燧)가 있었다.

전국 5개 노선의 직봉과 간봉을 합쳐 623개소에 달하였다. 이 중 세종시 지역에 설치된 봉수는 내지봉수에 해당한다. 연기 지역에 설치된 봉수가 바로 연기현의 남쪽[연기면 갈운리 원곡]에 설치된 용수산 봉수이다. 용수산 봉수는 동쪽으로 청주 저성(猪城)봉수, 서쪽으로 공주 독성(禿城)봉수와 연결되었다.

[가치와 의의]

세종특별자치시의 유일한 봉수인 용수산 봉수는 조선시대 충북 청주 저성 봉수, 공주 독성 봉수와 연결된 내지봉수 유적으로 지역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에 전하던 군사 통신 시설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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