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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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興寺碑石 |
영어공식명칭 | Daeheungsa Tombstone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구림리 799]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인선 |
대흥사 비석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구림리 799] |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대흥사의 표충사와 부도전에 있는 조선시대 23기의 비석.
[개설]
대흥사(大興寺) 비석(碑石)은 총 23기로 표충사에 3기, 부도전에 20기가 전한다. 표충사의 비석은 표충사의 건립과 관련된 비이고, 부도전에는 사적비 1기, 고승탑비 12기, 공덕비 2기, 교건립(橋建立) 관련 비 3기 등이 있다.
[표충사에 자리한 비석]
표충사에는 표충사의 사적을 기록한 서산대사 표충사 기적비(西山大師表忠祠紀蹟碑)[1792, 전체 높이 372.3㎝]와 표충사 건립 기록인 건사사적비(建詞事蹟碑)[1791, 전체 높이 328.2㎝], 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청대사문생열록비편(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淸虛大師門生列錄碑片)[조선 후기] 등 3기이다. 이 중 완형인 2기의 비석에 대해 살펴보면 서산대사 표충사 기적비는 방형의 대좌에 비신을 세우고, 옥개형의 개석을 올려놓았다. 서유린(徐有隣)이 글을 짓고 정동준(鄭東浚)이 글씨를 쓰고, 심이지(沈頤之)가 전서(篆書)를 썼다. 비문 말미에 ‘성상십육년임자년월 일(聖上十六年壬子午月 日)’이라고 새겨져 있어 1792년 건립된 비임을 알 수 있다.
비문에 의하면, 서산대사의 법명은 휴정(休靜)이며 호는 서산(西山)은 혹은 청허자(淸虛子)라고도 한다. 속성(俗姓)은 최씨(崔氏)이며 안주(安州) 사람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는데 열 살에 부모를 여의고 출가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宣祖)가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으로 임명하자 제자인 유정(惟政)과 처영(處英) 등과 함께 승병(僧兵) 5,000여 명을 규합하여 공을 세웠다. 1604년(선조 37) 세수(世壽) 85세로 입적하였으며, 7세 법손 천묵(天黙) 등이 1788년(정조 12) 전라도 대둔사(大芚寺) 남쪽에 사우(祠宇)를 건립하자 정조가 표충(表忠)이라고 사액(賜額)하였다. 건사사적비는 방형의 대좌에 비신을 세우고 방향의 이수를 올렸다. 서산(西山)의 6세 법손(法孫) 연담(蓮潭) 유일(有一)이 글을 짓고 응운(應雲) 등오(登旿)가 글씨를 썼다. 비의 건립은 측면에 ‘숭정기원후삼신해 월 일입(崇禎紀元後三辛亥 月 日立)’이라고 새겨져 있어 1791년 건립된 비임을 알 수 있다.
비문에 의하면 1788년(정조 12) 대둔사(大芚寺)의 승려 천묵(天黙)과 계홍(戒洪) 등이 한양에 올라와서, 서산대사가 승병(僧兵)을 가장 먼저 주장하였으면서도 배향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상언(上言)하였다. 이에 조사를 맡은 호조판서 서유린(徐有隣)이 사실을 조사하여 정조에게 아뢰자 정조가 사당을 지을 것을 윤허하고 표충(表忠)이라고 사액(賜額)하는 한편,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고 한다.
[대흥사 사적비]
대흥사 사적비[높이 5.5m]는 부도군을 약간 지나면 탑비만 있는 중앙에 있다. 여의주를 물고 있는 귀부에 탑신과 옥개형의 개석을 올려놓았다. 양 측면에는 용이 조식되어 있다. 비문은 채팽윤(蔡彭胤)이 지었으나 글씨를 쓴 사람은 기록되지 않아 알 수 없다. 비의 말미에 ‘성상즉위지삼년해 미 월 일(聖上即位之三年歲 彌 月 日) 자계해추시갑자구일립(自癸亥秋始甲子九日立)’이라고 새겨져 있어 1727년 비문을 짓고 1743년 공사를 시작하여 1744년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비의 내용은 대흥사의 창건과 중창에 관한 기록이다.
[대흥사 탑비]
대흥사 비석 중 승려들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는 총 12기가 부도전에 건립되어 있다. 건립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해남 대흥사 청허당 휴정대사비(海南大興寺淸虛堂休靜大師碑)[1647년 건립, 1778년 다시 세움, 전체 높이 380㎝], 해남 대흥사 풍담당 의심대사비(海南大興寺楓潭堂義諶大師碑)[1692, 전체 높이 321㎝], 월저대사탑비(月渚大師塔碑)[1739, 전체 높이 322㎝], 화엄강사연담화상지비(華嚴講師蓮潭和尙之碑)[1803, 전체 높이 370㎝], 환성당대사비(喚醒堂大師碑)[1822, 전체 높이 337㎝], 함월당대사비(涵月堂大師碑)[1822, 전체 높이 288㎝], 호암당대사비(虎巖堂大師碑)[1822, 전체 높이 297.5㎝], 동방십오조연파대사비(東方十五祖蓮坡大師碑)[1855, 전체 높이 313㎝], 완호대사탑비(玩虎大師塔碑)[1858, 전체 높이 252㎝], 철선당대사비(鐵船堂大師碑)[1876, 전체 높이 287㎝], 상월대사탑비(霜月大師塔碑)[조선 후기, 전체 높이 375㎝], 초의대종사의순탑비(草衣大宗師意恂塔碑)[1941, 전체 높이 307㎝]이다. 승려 청허와 청허의 법맥을 이은 승려들로 특히 13대종사가 7명으로 가장 많다. 형식적으로 분리하면 귀부, 비신, 이수의 통식의 비는 해남 대흥사 풍담당 의심대사비이고, 귀부, 비신, 방형의 옥개석형태의 개석을 가진 비는 해남 대흥사 청허당 휴정대사비, 연담화상비이다. 방형의 비좌에 비신, 이수 형태의 비는 월저대사탑비이고, 나머지 고승의 비는 방형의 비좌, 비신, 옥개형의 개석을 얹은 형태이다. 다만 초의의순의 비만 자연석의 비좌를 사용하였다.
[기타 비석]
대흥사 비석 중 기타 비석으로는 다리 관련 비 3기 공덕비 2기가 부도전에 건립되어 있다. 다리 관련 비 3기는 다음과 같다. 운학교중건비(雲鶴橋重建碑)[1749, 전체 높이 116㎝]는 방향의 비좌에 비신을 세우고 상부는 둥글게 깎았으며, 이수는 생략하였다. 만폭교창건비(萬瀑橋創建碑)[1751, 전체 높이 165.5㎝] 역시 방향의 비좌에 비신을 세웠는데 상부는 둥글게 깎았으며, 이수는 생략하였다. 두륜산대흥사심진교석조비기(頭輪山大興寺尋眞橋石造碑記)[1940, 전체 높이 286.5㎝]는 방형의 비좌 위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올렸다. 이 중 운학교는 부도밭에서 천왕문 가는 계곡을 잇는 다리이고, 심진교는 대흥사 북원을 진입하기 위해 건너는 다리이다. 만폭교는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한다. 공덕비 2기는 응송당기념비(應松堂紀念碑)[1942, 전체 높이 300㎝]와 두륜산월초당화상창공송비(頭輪山月初堂和尙彰功頌碑)[1944, 전체 높이 272㎝] 등이다. 응송당기념비는 자연석의 비좌 위에 장방평의 비신을 세웠다. 응송당[1893~1990]은 완도 사람으로 속명은 박영희이다. 초의의 법맥과 다맥을 이었으며, 20여 년 간 대흥사 주지를 역임하였다. 두륜산월초당화상창공비는 방형의 비좌 위에 비신을 세우고 위에 이수를 올렸다. 월초당[1868~?] 창준(昌準)의 창공비(彰功碑)[공훈을 표창하여 세상에 널리 드러낸 비]는 1926년 승려 박한영이 비문을 지었고 1944년 건립하였다. 월초당은 1868년 완도에서 태어나 15세에 대흥사에 출가하였으며 대흥사 고월교(高月橋) 건립에 많은 돈을 시주한 승려로 비에는 기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대흥사에 건립된 비석 23기는 한 사찰에 건립된 비석의 숫자로는 가장 많은 숫자가 전해져 조선 후기 대흥사의 사세 및 불교계에서 대흥사가 차지하는 위치가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표충사의 2기의 비석은 승려 청허의 사당인 표충사의 건립 내력 및 승려 청허의 행장을 밝혀 줄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대흥사 탑비는 대흥사를 빛낸 고승들의 행장을 기록하고 있어 호남 지역 불교사 연구의 중요한 가치를 지닐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탑비 건립 양식이 거북 형태의 귀부에서 방형의 비좌로 변화하고, 개석 또한 이수에서 옥개석 형태로 변화하는 등 조선 후기 탑비의 건립 양식의 변천을 반영하고 있어 미술사적으로 조선 후기 탑비 연구의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