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6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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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明坤 |
영어공식명칭 | Kim Myongg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최성환 |
출생 시기/일시 | 1886년 1월 18일 - 김명곤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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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9년 3월 - 김명곤 해남보통학교 재학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04월 06일 - 김명곤 해남 독립 만세 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22년 08월 10일 - 김명곤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3년 - 김명곤 대통령표창 수훈 |
출생지 |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한자리 |
거주|이주지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고도리 |
학교|수학지 | 해남공립보통학교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향교길 20[수성리 105] |
활동지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1919년 4월 6일 독립 만세 운동 참가 |
[정의]
일제강점기 해남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명곤(金明坤)[1886~1922]은 1886년 1월 18일 해남군 황산면 한자리에서 태어났다. 해남공립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4월 6일 해남 지역 최초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활동 사항]
해남 지역의 독립 만세 운동은 해남읍에 있던 해남공립보통학교 생도들에 의해 처음 전개되었다. 해남공립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명곤은 일제 식민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1일 김규수(金奎秀)가 해남보통학교 기숙사 방에서 김한식(金漢植)·신건희(申健熙)·윤옥하(尹玉夏)·임영식(任永植) 등과 함께 뜻을 같이하기로 먼저 결의하였다. 이튿날인 4월 2일 김규수·김한식·임영식은 기숙사 생도 윤준하(尹俊夏)·이사국(李士國) 등을 동지로 모았고, 4월 3일에는 김명곤을 비롯한 김영휘(金永輝)·이재실(李在實)·이준탁(李準鐸) 등이 합류하였다.
1919년 4월 5일에는 김명곤·김규수·신건희·이재실 등이 해남공립보통학교 기숙사에 모여 1919년 4월 6일 해남읍 장날을 이용해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준비하였다. 김규수·윤백인 등은 돈을 모아서 천과 물감 등을 구입하였으며, 김성암·윤준하 등과 함께 천으로 만든 태극기 80개와 작은 태극기 8개, 종이 태극기 80여 개를 만들었다. 신건희는 독립선언 광고문을 기초하고, 김규수·윤옥하·임영식 등은 이를 등사하였다.
1919년 4월 6일 오후 1시경 해남읍 장날에 사람들이 모여들자 김명곤 등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고, 시장에 있던 군중 1,000여 명도 독립 만세를 큰소리로 외치며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 일로 김명곤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19년 5월 6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4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김명곤은 1922년 8월 10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3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명곤의 공적을 기려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