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6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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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光勳 |
영어공식명칭 | Baek Kwanghun |
이칭/별칭 | 창경(彰卿),옥봉(玉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윤섭 |
출생 시기/일시 | 1537년 - 백광훈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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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64년 - 백광훈 진사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577년 - 백광훈 선릉참봉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582년 - 백광훈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41년 - 백광훈 문집 『옥봉집(玉峯集)』 간행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1년 - 백광훈 유품을 보관하기 위해 육봉유물관 건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1년 07월 19일 - 백광훈의 유품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1호로 지정됨 |
출생지 | 전라도 장흥군 - 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
거주|이주지 | 전라도 해남현 -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 |
수학|강학지 | 전라도 해남현 -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 |
수학|강학지 | 한성부 - 서울특별시 |
묘소|단소 |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동해리 -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동해리 |
사당|배향지 | 서봉서원(瑞峯書院) - 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 현산리 |
사당|배향지 | 옥산서원 -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송산리 |
성격 | 문인|시인 |
성별 | 남 |
본관 | 해미백씨 |
대표 관직|경력 | 참봉|감조관 |
[정의]
조선 전기 해남에서 활동한 문인이자 시인.
[개설]
백광훈(白光勳)[1537~1582]은 문장가이자 시인으로, 최경창(崔慶昌)[1539~1583]·이달(李達)[1539~1612]과 더불어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
[가계]
백광훈의 본관은 해미(海美)이며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峯)이다. 아버지는 참봉을 지낸 백세인(白世仁)이며, 어머니는 김광통(金廣通)의 딸 광산김씨(光山金氏)이다. 부인은 정강왕의 딸 하동정씨(河東鄭氏)이며,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백광홍(白光弘)과 백광안(白光顔)이 형이다. 아들은 백진남(白振南), 손자는 백상빈(白尙賓)이다.
[활동 사항]
백광훈은 1537년(중종 32) 장흥군 안량면 기산리에서 태어났다. 1549년(명종 4) 상경하여 대제학과 영의정 등을 지낸 당대의 석학 박순(朴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해 13세의 나이로 초시에 급제하여 세인의 놀라움과 촉망을 한 몸에 받았으며, 그 후 양응정(梁應鼎), 노수신(盧守愼) 등 경학과 문장의 대가 밑에서 꾸준히 학업을 쌓아 10대에 벌써 시와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1546년(명종 19) 사마시에 응시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당시의 혼탁하고 부패한 사회상과 불의와 야합해야만 관직에 오를 수 있는 현실에 혐오를 느껴 문과 응시를 단념하고 낙향하였다. 이후 하동정씨와 혼인한 뒤 옥천면 송산리로 이주하였다.
백광훈의 글과 글씨는 명나라 사신들이 놀랄 정도로 뛰어났다. 1572년(선조 5) 명나라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자 접반 책임을 맡은 노수신(盧守愼)은 명나라 사신을 상대로 시문을 응수할 인물로 해남에 은거하던 백광훈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백광훈은 시문뿐 아니라 명필로도 알려졌으며, 특히 영화체(永和體)는 독보적 경지를 이룩하여 해동필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백광훈은 젊은 시절에 이이(李珥), 송익필, 최립(崔岦), 이산해, 양사언, 이순인, 하응림 등과 무이동(武夷洞)에 모여 교류하였으며, 세상에서는 이들을 팔문장(八文章)이라 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뛰어난 문장가인 정철(鄭澈)과 특히 정철과 막역한 사이였다. 정철은 『송강집(松江集)』에 “옥봉의 문장은 빼어남과 맑음을 기개로 하고 있고 청명한 시가와 오묘한 필법은 으뜸가는 재주다. 동이 술로 글을 논할 때 언제나 칼날처럼 서늘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백광훈은 벼슬에 뜻이 없었지만 친지들의 강권에 못 이겨 1577년(선조 10) 선릉참봉으로 관직에 나갔으며, 정릉·예빈시·소격소(昭格署)의 참봉을 지냈다. 소격서참봉으로 재직할 때 병에 걸려 1582년(선조 15) 5월 14일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백광훈의 저서로는 1847년 간행된 4권 2책의 『옥봉집(玉峯集)』이 있다. 대표작으로는 「홍경사(弘慶寺)」, 「용강사(龍江詞)」, 『달량행(達梁行)」 등을 꼽을 수 있다.
[묘소]
백광훈의 묘소는 해남군 북평면 동해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백광훈은 이후백(李後白)을 배향하기 위해 1590년 강진군 작천면 현산리에 창건된 서봉서원(瑞峯書院)에 1712년(숙종 38) 최경창(崔慶昌)과 함께 배향되었다. 또 아들 백진남은 1712년 해남군 옥천면 송산리에 옥산서원을 지어 아버지를 추모하였다. 백광훈과 후손들의 유품을 보관하기 위해 1981년 옥봉유물관이 건립되었으며, 1991년 7월 19일 백광훈의 유물 9종 113점이 ‘옥산서실 소장품 일괄’이라는 이름으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1호로 지정되었다. 옥봉사에서 매년 봄가을에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