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5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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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延安李氏 |
영어공식명칭 | Yeonan Lee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윤섭 |
본관 | 연안 - 황해도 연백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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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 |
성씨 시조 | 이무(李茂) |
입향 시조 | 이복길(李復吉) |
[정의]
이무를 시조로 하고 이복길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남도 해남군의 세거 성씨.
[개설]
연안이씨는 해남군의 세거 성씨 가운데 하나로 해남 입향조는 이복길이다.
[연원]
연안이씨(延安李氏)의 시조는 당(唐)나라 장군 이무(李茂)이다. 이무는 660년 소정방(蘇定方)이 신라의 동맹군으로 백제를 침공했을 때 중랑장으로 따라왔다가 신라에 귀화한 것으로 전한다. 연안이씨는 계통을 달리하는 세 파가 있는데, 이습홍(李襲洪)·이현려(李賢呂)·이지(李漬)를 각각 중시조로 하고 있다.
[입향 경위]
해남의 연안이씨는 고려 공민왕 때의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동반 급제해 벼슬길에 나갔고 통례문부사를 지낸 이지를 중시조로 삼고 있다. 연안이씨가 해남에 입향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 때 이후백의 아들 이선경(李善慶)이 왜군에게 살해되자 둘째 아들인 이유길(李有吉)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삼산면 충리로 내려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형제들이 모두 내려와 큰아들 이태길(李泰吉)은 강진에 정착하였으며, 이유길은 삼산면 충리에 살다가 강진 당동으로 옮기고 셋째 이복길(李復吉)은 송호(松湖) 백진남(白振南)의 사위가 되어 삼산면 송정리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넷째 이익길(李益吉)은 영암군에 터를 잡고 살았다. 또한 다섯째 이정길(李井吉)은 계곡면 반계리에 거주하다 이후 파주시로 옮겼다.
이들 중 셋째인 이복길이 연안이씨 해남 입향조이다. 이복길은 김사계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정묘호란 때 김사계의 종사관으로 호서, 호남 지역 의병 수천 명을 모으기도 하였다.
연안이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1520~1578]을 들 수 있다. 이후백은 1546년(명종 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55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주서를 거쳐 1558년 승문원박사로 사가독서(賜暇讀書)[조선시대에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케 하던 제도]하였다. 1573년 변무사(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간 중국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이성계의 세계(世系)를 고쳐 달라고 주청하던 일]의 공을 세워 연양부원군에 책봉되었다. 이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사망한 뒤 나라에서 문청(文淸)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후백의 손자 이태길은 구례현감을 지냈고, 이유길은 명량대첩에 의병으로 참전해 공을 세운 후 함흥판관을 역임하였다. 이후 이유길은 평안도 영유현(永柔縣)에서 전봉장(前鋒將)으로 왜군과 싸웠으며, 명나라 유정(劉綎)의 원군에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숙종 때 충의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는데 그 비각이 삼산면 충리에 남아 있다.
[현황]
해남 지역 연안이씨는 삼산면을 중심으로 충리, 원진리, 송정리 등에 모여 살고 있으며, 충리에 20여 호, 원진리에 10여 호가 살고 있다.
[관련 유적]
1893년(고종 30)에 건립한 이유길 유허비각이 삼산면 충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