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595 |
---|---|
한자 | 驪興閔氏 |
영어공식명칭 | Yeoheung Min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윤섭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447년 - 민중건 출생 |
---|---|
입향 시기/일시 | 1453년 - 민중건 해남 입향 |
본관 | 여흥 - 경기도 여주시 |
입향지 | 해남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
세거|집성지 | 전라남도 해남군 마산면 화내리 |
성씨 시조 | 민칭도 |
입향 시조 | 민중건 |
[정의]
민칭도를 시조로 하고 민중건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남도 해남군의 세거 성씨.
[개설]
여흥민씨(驪興閔氏)는 해남군의 세거 성씨 가운데 하나로, 마산면 지역에 주로 기반을 두고 있다.
[연원]
여흥민씨는 고려시대 상의봉어(尙衣奉御)를 지낸 민칭도(閔稱道)를 시조로 한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자건(子騫) 민손(閔損)의 후손 민칭도가 고려 때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귀화하여 여흥[현 경기도 여주시]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민칭도의 증손자인 민영모(閔令謨)는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태자태사(太子太師)를 지냈으며, 민식의 증손자 민지(閔漬)는 원종 때 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첨의정승을 지내고 1321년(충숙왕 8)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다. 이후 여흥민씨는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명문가로 자리 잡았다.
조선시대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동생인 민진원(閔鎭遠)은 1691년(숙종 17) 문과에 급제한 뒤 우의정·좌의정·판중추부사를 역임하며 노론의 영수로 활약하였고, 개항기 민치록(閔致祿)은 딸이 고종의 비가 되자 영의정에 추증되고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민치록의 딸 명성황후(明成皇后)는 흥선대원군과 대립하면서 고종의 친정(親政)을 실현하였다. 민겸호(閔謙鎬)는 판돈령부사를 지낸 뒤 정치제도 개혁을 주도하였고, 선혜청 당상관에 올라 영의정 민규호(閔奎鎬)와 함께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민겸호의 아들 민영환(閔泳煥)은 병조판서·한성부판윤 등을 지냈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자결하였다.
[입향 경위]
여흥민씨가 해남에 정착한 시기는 조선 초이다. 1453년(단종 원년) 계유정난(癸酉靖難) 당시 이조판서를 지냈던 민신(閔伸)[?~1453]은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아들인 민보창(閔甫昌)·민보해(閔甫諧)·민보석(閔甫釋)·민보흥(閔甫興)과 함께 참형을 당한다. 이 과정에서 민신의 막내아들인 민중건(閔仲騫)만이 살아남아 해남으로 피신하였다. 당시 집안의 종이 일곱 살이던 민중건을 항아리에 넣어 지게에 짊어지고 진도군수로 있던 외삼촌 김종(金淙)에게 내려왔다고 한다.
옛 진도 땅이었던 해남군 삼산면에서 자란 민중건은 성장하여 해남정씨(海南鄭氏)와 결혼한 뒤 해남읍 해리로 분가하였다. 이후 민중건의 후손 대에 이르러 마산면 화내리로 옮겨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현황]
여흥민씨 후손들은 2015년 현재 해남 지역에 600여 호가 살고 있다. 마산면 화내리와 장촌리를 비롯해 마산면 지역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또한 해남읍 해리, 산이면 송천리, 황산면 연호리와 원호리 등에도 여흥민씨가 많이 살고 있다.
[관련 유적]
해남 여흥민씨 관련 유적으로는 해남읍 해리의 미산서원(眉山書院)과 해남읍 서림공원 사충문(四忠門), 마산면 남계리의 해남 여흥민씨 부조묘가 있다. 미산서원은 계유정난 때 희생된 민신·민보창·민보해·민보석·민보흥 부자를 배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