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4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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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佛像 |
영어공식명칭 | Statue of the Buddha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인선 |
[정의]
전라남도 해남 지역에 고려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불교 교리에 입각하여 예배 대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조형물.
[개설]
해남 지역의 불상은 대흥사, 미황사, 서동사, 은적사 등의 사찰 및 암자에 봉안된 불상이 대부분이다. 재질별로는 금동, 석조, 목조, 철조 등 다양하다. 시기별로는 고려시대 6점, 조선 전기 1점, 근대 1점이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다. 불상들은 예배 대상으로 신앙의 중심 역할을 하였으며, 모든 사람의 의지처로서 지역민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시대별 불상은 통일신라시기,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구분할 수 있고, 주요 사찰인 대흥사와 미황사 불상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해남 지역의 불상은 국보 1점, 보물 3점, 지방문화재 5점, 향토문화유산이 2점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불상들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시대별 불상]
통일신라시기인 8세기에 본격적으로 해남 지역에 불교가 유입되면서 해남 대흥사 삼층석탑이 조성되었다. 당시 석탑과 함께 불상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 시기에 해당되는 유물은 남아 있지 않다.
고려시대에도 불전과 불상, 불탑의 조성은 지속되었다. 고려 초기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과 함께 6m 규모에 이르는 거불상(巨佛像)의 마애불이 조성되었다.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은 신체의 표현에서 입체감이 두드러진 마애불로 평가받고 있으며, 은적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손모양이 일반 철불과 달리 반대 방향을 하고 있는데 광주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은 형태이나 다른 수법은 증심사의 불상과 달라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고려 초기 해남 지역에 선종이 보급되었음을 알려 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이 외에도 고려 초기에 조성된 대흥사 남미륵암 마애불은 크기가 5m에 이르고, 3중의 두광을 둔 선각의 마애불로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 외에도 고려시대에 조성된 금동불 입상 1구, 금동탄생불 입상 1구, 금동불 좌상 1구가 대흥사 성보박물관에 전한다.
조선시대 불상 중 시기가 가장 빠른 불상은 해남 대흥사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인 해남 대흥사 금동관음보살좌상으로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무릎 위에 오른팔을 자연스럽게 올려놓고, 왼손으로 바닥을 짚고 있는 윤왕좌(輪王座)를 취하고 있다. 해남 대흥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은 보관과 장신구들의 표현은 전반적으로 고려시대 보살상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나 타원형의 온화한 인상이나 신체에 간략한 영락 장식의 착용, 신체를 감고 있는 천의 등에서 고려 후기의 보살상보다 도식화된 특징을 보이는 조선 전기에 조성된 보살상이다. 또한 조선 후기에 관음상이 중수 개금된 사실과 봉안처를 알 수 있어 불교미술사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외에도 많은 불상이 제작되어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유재란으로 인해 사찰이 불에 타면서 남아 있는 유물은 없다.
조선 후기 해남 지역은 1600년대 초반 해남 대흥사를 시작으로 많은 사찰의 복원 불사가 이루어지면서 많은 불상이 제작되는데 최초의 불상은 1612년 태전(太顚)이 조성한 해남 대흥사 석가여래삼불좌상이다. 이후 미황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존상[1630~1640년대, 인균(印均) 조성 추정], 1648년 행사(幸思)에 의해 도장사 본존과 보살좌상이 조성되고, 1650년 운혜(雲惠)에 의해 서동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이 조성되었다. 17세기 중반에는 운혜가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해남 미황사 명부전 목조 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이 조성되었고, 1670년 대흥사 대광명전 목조삼방불좌상[응혜(應惠) 또는 계찬(戒贊) 조성 추정]이 진불암에 봉안하기 위하여 조성되었다. 해남 미황사 응진당 목조 석가여래삼존상 및 나한상 등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호남 일대에서 가장 많은 유작을 남긴 색난(色難)[조선 후기 조각승]과 색난파(色難派)에 의해 1701년에 조성되었고, 진불암 목조여래좌상 및 나한상 일괄 또한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기에 색난파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722년 비구 단열이 청준과 합심하여 해남 미황사 응진당 목조 석가여래삼존상 및 나한상이 조성되었다. 해남 대흥사 천불전의 천불상은 1817년 풍계현정(楓溪賢正)에 의해 경주 기림사에서 조성되었다. 이 외에도 대흥사 청신암 목조아미타삼존불은 19세기에 조성된 소형 불상으로 추정되지만 조각가가 누구인지는 확정하기 어렵다.
[주요 사찰별 불상]
해남 지역에는 대흥사, 미황사, 서동사, 도장사, 은적사 등의 고찰에 불상들이 남아 있는데, 대흥사와 미황사에 대부분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대흥사의 불상은 고려시대 마애불 2기와 금동불 3점, 조선 전기 금동관음보살좌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 후기의 작품이다. 대흥사의 불상이 조선 후기에 많이 조성된 것은 1607년 서산대사의 의발이 대흥사에 전해지면서 조선 후기 선교양종의 대본산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불상의 조성은 1612년 태전 등에 의해 대웅전에 봉안하기 위해 조성한 약사불상과 아미타불상을 시작으로, 1650년 운혜 또는 운혜파 조각승들에 의해 명부전의 사왕, 판관, 귀왕 사자, 장군 등이 조성되었다. 1670년 대광명전 삼방불상[원 봉안처 대흥사 진불암]이 응혜(應惠) 또는 계찬(戒贊)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701년 응진당 삼세불상과 16나한상이 색난과 색난파에 의해 조성되었고,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색난 등에 의해 진불암 응진당 목조보살좌상 및 나한상 등이 조성되었다. 천불전의 천불상은 1817년 풍계현정(楓溪賢正)에 의해 경주 기림사에서 조성되어 대흥사로 옮겨진 불상들로, 일부는 일본에 표류하였다가 귀환하였다. 청신암 목조아미타삼존불은 19세기에 조성된 소형의 불상으로 추정되지만 조각가가 누구인지는 아직 확정하기 어렵다.
미황사는 749년 창건된 사찰로 알려져 있다. 1597년 임진왜란으로 사찰이 소실되었고, 1598년 산역을 시작하여 1601년 중건 공사를 마무리하였고, 이후 1658년 비구 성간(省侃)이 건물과 축대를 쌓았고, 1680년 중정 전면의 축대를 조성하였다. 1751년에 덕수(德修) 승려에 의해 동서 양쪽에 금고각(金鼓閣)을 세우고 기와를 번와하는 등 중창불사가 이루어져 1754년에 마무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미황사에는 대웅전, 응진당, 명부전 등에 조선 후기에 조성된 불상, 나한상, 시왕상 등의 다양한 불상들을 조성하여 봉안하고 있다. 미황사의 불상은 1630~1640년대에 인균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생각되는 해남 미황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을 시작으로 17세기 중반 운혜가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명부전 목조 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등 36구의 존상이 조성되고, 1722년 비구 단열이 청준과 합심하여 해남 미황사 응진당 목조 석가여래삼존상 및 나한상 등 26구의 존상이 조성되어 봉안하였다.
[지정 문화재별 불상]
해남 지역의 불상 중 대흥사의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은 6m 규모에 이르는 거불상(巨佛像)이다. 바위의 동남쪽 면을 잘 다듬어 불좌상과 네 비천을 새겼다. 마애불에서 광배와 화염 사이에 4구의 비천을 배치하여 장엄을 한 예는 보기 어렵다. 앉은 자세에서 왼손을 선정인으로 하고 오른손은 촉지인을 취하였다. 법의는 통견으로 두 어깨를 가리고 왼 어깨에서 매듭을 묶었다. 법의의 주름은 골고루 빼곡하게 잡혀 있다. 광배는 삼중의 원형신광과 두광으로 퍼져 나갔다. 두상이 크고 상체의 조각이 중부조인데 비해 손과 배와 다리의 조각은 약한 편이다. 연꽃대좌는 양감 있게 부풀어 있어 마애불의 입체감을 상승시켰다. 고려 초기를 대표할 만한 마애불로 2005년 9월 28일 국보 제308호로 지정되었다.
대흥사 천불전 천불상은 천불전에 봉안하기 위해 1817년 경주 옥석으로 제작한 1014분의 불상이다. 상의 높이는 16~18㎝의 소형으로 머리와 육계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고, 정상계주와 중간계주를 표현하였다. 얼굴의 형태는 각 상마다 다르고 이목구비는 평면적이다. 어깨는 둥글고, 대의는 오른쪽 어깨를 감싼 옷자락이 허리 안으로 들어가는 변형된 편단우견이다. 수인은 합장을 한 경우, 양 손을 무릎에 올려놓는 경우, 옷깃 속에 감춰진 경우 등 다양한데 특히 양손을 무릎에 올려놓는 경우가 많다. 같은 시대에 제작한 불상이지만 각 상호나 형태, 수인 등이 제각각인 것은 경상 화원 9명, 영남 화원 24명, 전라도 화원 11명 등 전국의 화원 44명이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천불상은 불상 조성의 발원, 조성, 이운 등에 이르는 전 과정에 대한 소상한 기록을 통하여 조선 후기 불상의 제작 방식을 알려주는 매우 귀중한 사례로 평가받아 1974년 9월 24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해남 지역의 불교 조각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였으나 대부분은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고, 나중에 복구하면서 제작된 조선 후기 불상이 대부분이다. 불상들 중 17세기 불상들이 대표적인데 17세기에 활동하였던 태전, 인균, 운혜, 행사, 응혜, 계찬 등 다양한 조각승들에 의해 당대를 대표할 만한 불상들이 제작되어 17세기 불교 조각의 다양성 및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