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395
한자 太平亭
영어공식명칭 Taepyeongjeong Pavilion
이칭/별칭 태평장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터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남문길 15[서상리 382]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변남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400년대 중반 - 태평정 건립 추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일제강점기 - 태평정이 광장으로 바뀌고 태평장으로 개칭
소재지 태평정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남문길 15[서상리 382]지도보기
성격 누정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서상리 우수영 성안에 있었던 조선시대 누정.

[개설]

태평정태평장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언제 초설되어 언제 훼철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전라수영이 1440년(세종 22) 전라남도 무안 당포에서 옮겨오고 성(城)의 망루처로 건축되었으므로 15세기 중반에 성과 동시에 건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태평정은 우수영 성 남쪽 돌출부에 만들어진 웅장하고 화려한 망루이자 연회 장소였다. 여러 기록에 등장하며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 이전에 우후 이정충과 태평정에서 깊은 대화를 나눈 유서 깊은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훼철되어 광장으로 바뀐 뒤 수탈 장소, 장터, 체육 공간, 문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을 보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여러 문집,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등장한다.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남곤(南袞)[1471~1527]의 시가 『동국여지승람』에도 등장하고, 양응정(梁應鼎)[1519~1581]의 『송천선생유집(松川先生遺集)』과 조숙(曺淑)[1504~1582]의 『죽헌선생문집(竹軒先生文集)』에도 태평정이 언급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기록을 보면, 이경전[1567~1644]이 전라감사로 있을 당시[1613~1615] 지은 시에 등장하고, 이의승(李宜繩)]1665~1698]의 『원옹집(圓翁集)』, 김진상(金鎭商)[1684~1755]의 『퇴어당유고(退漁堂遺稿)』 등에도 등장한다. 김이만(金履萬)[1683~1758]의 『학고집(鶴臯集)』에서 “여러 벼슬아치들과 함께 태평정에 올라 연회와 포상을 열었다[戊申八月 越一日日抵水營. 謁節度使于伏波舘. 退與諸使君登太平亭 宴賞].”라고 하였다.

1596년 이순신 장군은 육로를 통하여 순찰을 하던 중 윤달 8월 26부터 3일간 우수영에서 머물렀는데, 당시 거처가 태평정이었다. 『난중일기』 1596년 윤8월 26일 내용에 “일찍 해남을 떠나 우수영에 이르렀다. 나는 곧 태평정(太平亭)에서 자기 전 우후 이정충과 대화를 나눴다.”라고 하였다. 『우수영태평정기(右水營太平亭記)』는 해남 출신 윤광계(尹光啓)[1559~?]가 1614년(광해군 6) 7월 어느 날, 전년 봄에 해남 우수영의 태평정을 방문하고 느꼈던 감회를 서술한 글이다. 임진왜란으로 쇠락한 태평정을 중수한 이광영(李光英)[1598~1657]의 공적을 칭송한 내용이 나온다. 또 “태평정은 아주 웅장하고 화려하였다[又有所謂大平亭者 尤爲宏傑詭麗].”라고 하였다. 이광영은 1614년 8월 전라우수사에서 파직당한 인물이다.

[변천]

『전라우수영계록(全羅右水營啓錄)』 1860년(철종 11) 3월 19일 기록에 의하면, “표류해 온 이국(異國)의 난파선(難破船)에서 철정(鐵釘)을 47근 3냥을 수집하였다. 이전의 사례에 따라 본영(本營) 태평정(太平亭) 중수(重修)에 들어가는 데 보태 쓰려 한다.”라고 보고하였다. 이후 태평정에 대한 기록은 『해남읍지』[1872]에서 위치만 전할뿐 더 이상 다른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일제 강점기 들어 우수영성을 훼철하고, 태평정 바깥 해변을 매립하여 만들어진 광장은 5일 장터로도 이용되면서 태평장이라 이름이 바뀌었다. 태평장 터는 일본 흥업회사의 면화, 쌀 등의 집하장으로, 전남축구대회, 씨름대회, 소리대회 등의 개최 장소로 활용되었다.

[위치]

태평정은 『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등 지리지에 “우수영 성의 남쪽에 있다[大平亭在南城內].”라고 하였는데, 태평정 터는 성의 남쪽 돌출부 문내면 서상리 382번지 인근이다.

[현황]

태평정 인근은 주변보다 높은 지역으로 큰 나무가 있다. 지적도상으로 성이 해안으로 돌출되어 있으며 지목은 산과 밭, 대지로 이루어져 있다. 태평정 부근에서 다수의 기와편과 백자편이 출토되었다.

[의의와 평가]

태평정전라우수영 수군진의 특성을 잘 보여 주는 누정이다. 우수영 성의 남쪽 돌출부에 건립하여 바다와 병선을 관망하는 망루이자 연회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이 우후와 지내면서 명량대첩을 사전에 구상한 곳이기도 하다. 태평정은 일제강점기 초기에 광장으로 변하여 수탈지, 장터, 문화와 체육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이처럼 태평정전라우수영 지역민의 삶과 문화를 간직한 공간이어서 더욱 의미가 깊기 때문에 발굴 복원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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