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3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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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浸溟館 |
영어공식명칭 | Chimmyeonggwan Guesthouse Sit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군청길 4[성내리 4]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변남주 |
건립 시기/일시 | 1437년 - 침명관 건립 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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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시기/일시 | 1813년 - 침명관 객사 중수 |
소재지 | 침명관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군청길 4[성내리 4] |
성격 | 객사 |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성내리에 있었던 조선시대 해남현의 객사.
[개설]
침명관(浸溟館)은 조선시대 해남현의 객사였다. 침명관은 1437년 현재의 위치로 치소를 옮긴 뒤 곧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13년(순조 13) 고쳐 지은 객사는 정전이 3칸이고, 동대청·서대청이 각 5칸이었다. 침명관은 일제강점기에 해남공립보통학교, 군청의 사무실 등으로 이용되었다.
[변천]
침명관의 침명(浸溟)은 해남의 역사성을 보여 주는 이름이다. 3세기 『삼국지』 「위지」의 ‘신미제국’, 4세기 『일본서기』의 ‘침미다례’, 6세기 「양직공도」의 ‘지미’라는 지명의 전통을 이어받은 통일신라 시기의 침명현의 역사성을 강조하기 위해 조선시대에 객사의 이름을 침명관(浸溟館)이라 하였다. 백제 시기 새금현은 현산면 고현리가 치소였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왕 시기에 침명현(浸溟縣)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437년 삼산면 녹산역 터에 객사를 짓고 침명관을 건립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침명관이라고 부른 것은 고려시대 현산면 고현리에 있었던 해남현의 전통성을 강조하는 의미로 추정된다.
중수한 객사 중 1813년의 것은 상량문이 전한다. 사진으로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객사의 모습은 1813년의 객사로 추정된다.
침명관은 한때 해남공립보통학교로 이용되었다. 해남공립보통학교는 해남향교에서 개교하여 10회 졸업생까지 배출한 후 1921년 군청 앞에 있던 객사인 침명관으로 학교를 옮겼다. 학제가 5년제로 바뀌자 학생 수도 급격히 늘어났다. 침명관에 교실 두 칸을 증축하고 학교 이름도 해남심상소학교로 개명하였다. 이후에도 학생 수가 계속 늘어나자 새로운 학교 부지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해남심상학교는 25회 졸업생까지 배출하고 1937년 현재의 해남동초등학교로 자리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침명관은 군청에서 사무실로 이용되었다. 해남현의 고지도를 보면 해남현의 심장부인 동헌은 객사와 함께 현재의 군청이 자리한 곳에 있었다. 객사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신 곳이기 때문에 해남현의 집무청인 아사(衙舍)라고 하는 동헌보다 격이 높다. 그런 만큼 관아 시설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화려하며 입지가 제일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해남현의 동헌은 정면에서 4칸, 객사가 13칸이었으며, 장중하고 위엄이 넘치는 위압적인 건물 형태를 보이고 있다. 최후에 남아 있었던 객사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동서로 위치하였다. 중앙의 정전(正殿)이 3칸, 동대청(東臺廳)이 5칸, 서대청(西臺廳)이 5칸으로 모두 13칸이었다.
[위치]
침명관은 해남현의 객사로 해남군 해남읍 성내리 4번지에 있는 현 해남군청 본관 인근에 있었다. 고지도를 보면 아사[동헌]가 북쪽에 있고, 객사는 남동쪽에 별도의 담장을 둘러 자리하였다. 객사의 남문은 망운루(望雲樓)였다. 1925년 발간된 『해남군지』에 의하면, 객사는 당시에 공립보통학교로 이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동헌인 금성헌 아사는 4칸으로 객사의 북쪽에 있었다. 또 장청은 6칸으로 객사의 남쪽에 있었으며, 1925년에는 경찰서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객사는 장청과 동헌 사이에 있었을 것이다. 구 경찰서는 현재의 군민광장이니, 객사는 현재의 해남문화예술회관, 그리고 동헌은 현 해남군청의 본관 자리로 추정된다.
[현황]
침명관 객사는 현재의 해남문화예술회관 자리이고 동헌은 현 해남군청의 본관으로 개축되었다.
[의의와 평가]
침명관은 조선시대 객사 이름으로 해남의 오랜 역사성을 보여 준다. 조선시대에 붙은 침명이라는 이름은 3세기 신미제국, 4세기 침미다례, 6세기 지미라는 유사 지명의 전통을 이어받은 통일신라 침명현의 역사성을 이어받았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