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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A010202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구산동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정아

진천읍 방향에서 구곡리 방향으로 가다가 가장 첫 번째로 만날 수 있는 곳이 구산동 외구마을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약 60여 년 전까지도 문을 열었던 문백광산이 있다.  외구마을 입구에서 마을길을 따라 약 200m를 올라가면 외구마을 뒤편으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 보인다. 산허리는 현재 밭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예전에는 광산으로 이용되던 곳이기 때문에 산세가 험하지 않아 광산 입구까지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광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없어진 후로 숲이 무성해져서 마을 쪽에서 광산 입구를 쉽사리 찾기는 힘들다. 또 현재는 광산 입구를 콘크리트로 막아서 광산 안도 살펴볼 수 없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폐광된 후 많은 사람이 다양한 용도로 이용하고 광도 깊은 곳까지 접근하므로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진천군에서 아예 입구를 폐쇄했다고 한다.

[마을의 번성을 자랑했던 아연 광산]

현재 마을 사람들 중에서 문백광산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문을 닫은 지가 60여 년이나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외구마을 주민들에게 문백광산은 어른들이 일하는 것을 구경하기도 하고 근처에서 놀기도 하는 등 아주 친근한 장소였다고 한다.

문백광산에서 주로 채집했던 것은 아연이었다. 아연은 충청북도에 위치한 광산에서는 채집하기가 수월하지 않았던 광물인데, 문백광산에서는 특히 많이 나왔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일거리를 찾아, 또는 아연을 찾아왔기 때문에 마을이 늘 시끌벅적했다고 한다. 외구마을 사람들 또한 당시 어려웠던 형편에 농사를 짓는 것이 생계 수단의 전부였는데, 광산이 문을 열면서 농사도 지으면서 부업으로 광산 일을 하여 형편이 조금 나아지기도 했다고 한다.

[피서지도 되고 김치냉장고도 되고]

한창 광물 채집이 이루어지는 낮 시간에는 동네 아이들이나 새댁들은 광산으로 갈 수 없었다. 그러나 작업이 끝나고 밤이 되면 광산 앞은 동네 아이들과 새댁들의 놀이터로 변했다. 특히 무더운 여름철에는 많은 사람이 광산 입구에서 더위를 피했는데,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광산 근처가 일종의 쉼터처럼 변했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물어 보니, 광산이 땅 속으로 뚫려 있는 굴이기 때문에 여름철이면 문 밖에 서 있기만 해도 찬바람이 불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운 여름이면 돗자리와 먹을 것을 들고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광산 근처에서 자리를 잡고 피서를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산속이다 보니 밤이 되면 무섭기 때문에 숨바꼭질도 하고 지금의 귀신놀이처럼 무서운 놀이도 했다. 특히 마을 새댁들이 중심이 되어 광산 앞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등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많았단다.

이렇게 서늘한 기운도 주면서 끊임없이 광물을 내어 주다 마침내 그 역할을 다할 때 쯤, 광산은 천연 냉장고로 또 한 번 마을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냉장고가 변변치 않던 시절인지라, 마을 사람들은 늘 시원하고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광산 안에 각자 자리를 정해 놓고 김치도 갖다가 놔두고, 여러 가지 음식도 저장하는 등 천연 냉장고로 사용했던 것이다.

지금은 할머니가 되어 버린 마을 아낙네들은, “광산이 좋았지. 시원하고 바람도 불어서. 김치도 갖다 놓고 그랬어.”라며 광산의 옛 모습을 추억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피난처가 되어 준 광산]

문백광산은 규모가 매우 커서 대량으로 아연을 생산했는데, 그 덕분에도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외구마을 사람뿐만 아니라 타지 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바로 피난처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전쟁이 나자 구곡리 주민들 중 외구사람들은 대부분 광산으로 피난을 갔단다.

"동네 사람도 가고, 먼 곳 사람들도 가고 그랬지. 아, 그럼 굴이 얼마나 큰데."

신중희 할아버지는 당시 많은 사람과 함께 광산으로 피난 갔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워낙 광산의 규모가 컸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과 먼데서 온 사람들이 광산에서 피난을 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가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산세가 험한 곳은 아니었으나 굴이 깊어서 군인들이 광산 깊은 곳까지 오지 않아 전쟁을 피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고 한다.

진천군은 증평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이 때문에 6·25전쟁 기간 격전지의 하나로서 진천의 중심 지역은 비행기에 의해 폭격을 당하기도 했지만 구산동마을은 외부에서 쉽게 들어올 수 없는 지형적인 조건에다 광산에서 전쟁을 피하기도 해서 생각보다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 망태산에 올라서 진천읍 쪽에서 벌어지는 전투 장면을 구경했다는 마을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구산동마을이 참 복 받은 마을이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정보제공]

  • •  신중희(남, 1925년생, 구곡리 구산동마을 주민)
  • •  임기용(남, 1935년생, 구곡리 구산동마을 주민)
  • •  김갑영(여, 1936년생, 구곡리 구산동마을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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