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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1098
한자 敎會
영어의미역 Church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제우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에 있는 기독교인들의 신앙 공동체.

[개설]

교회는 주로 기독교의 경우에 사용되며 예배당·성전이라는 용어도 쓰이나 이때는 건물 자체만을 뜻한다. 특히 천주교에서는 건물에 대한 호칭일 경우 성당 혹은 본당이라는 용어를 통용했기 때문에 흔히 교회는 개신교의 집회 장소에 한정해서 쓰였으나 최근에는 가톨릭에서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교회의 의미는 ‘주님께 속한 것’이며, 이 밖에 ‘만남’이나 ‘모임’을 뜻하는 어원이 되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교회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생활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의 구성원은‘선택된 자’이고, ‘따르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호칭은 구성원에 대한 종합적인 지칭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하며, 신앙의 고백과 세례 의식에의 참여를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서로 형제애를 지니고 살아야 하는 신비로운 몸이라고 하는 것이 다.

교회는 지역적·역사적 특성을 지니면서 초지역적·초시간적인 종교적 이념을 아울러 공유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제각기 다른 동방교회, 서방 혹은 라틴교회, 그리고 개신교[프로테스탄티즘] 등의 다른 교회 전통을 형성하게 한다.

프로테스탄트인 개신교가 한국에 처음 교회를 세운 것은 1884년 황해도의 솔내에서 서상륜(徐相崙)에 의해서였다. 그 뒤 각 교파에 따라 제각기 교회가 세워졌는데, 교회가 하나의 제도적인 조직으로 구체화 된 것은 1887년 장로교회가 처음이다. 개신교의 교회들은 종교 공동체로서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 변혁을 주도한 사회 세력으로서도 크게 기여한 바 있다. 특히 교육·의료·한글 보급, 그리고 새로운 인간관의 제시를 통하여 근대적 이념을 고취한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점차 외국의 여러 교파들이 들어와 경쟁적으로 선교를 시행한 결과 다양한 교파가 형성되었고, 신학의 주장이나 여타 사회적 요인들로 인하여 교회나 교파들이 이합집산 하면서 70여 교단에 이르고 있다.

개신교는 대부분이 장로회와 감리교의 교파였으며, 현재 장로교는 단일 교단으로 존재하는 한국기독교장로회와 수많은 교단으로 분열되어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로 양분되어 있다. 감리교는 기독교대한감리교회가 가장 큰 교세이며, 대체로 감리교회는 이 교단 소속이지만, 새롭게 생겨난 몇 개의 작은 교단들이 있다. 침례교·안식교·성결교·성공회·순복음교·여호와의 증인 등은 모두 단일 교단 체계이다. 이외에 1954년 설립한 통일교는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의 창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변천]

진천 지역 최초의 교회는 영국성공회로 1908년 신부 김우일(金宇逸)이 진천군 진천읍에 들어와서 선교소[성당]를 세우고 선교하기 시작했다. 감리교회의 진천 지역 선교는 1901년을 기점으로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으로 교회를 설립하여 선교 사업을 시작한 것은 1917년 4월 박홍근 등 남녀 신도 100여 명이 진천군 진천읍 87번지진천교회를 세우고난 이후부터이다.

진천의 천주교가 1800년대 초부터 계속되는 교란(敎亂)을 피해 진천군 백곡 등의 지역으로 들어온 교인들이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스스로 교회를 만들어 신앙생활을 이어온 고난에 찬 것이었다면, 진천의 개신교는 사목자(司牧者)가 먼저 들어와 터를 잡고 주민들을 모아 복음을 전도하는 비교적 순탄한 것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들 교회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진천 지역에서도 외국 선교사들이 교회 부설 학교와 의료 시설 등을 통하여 진천 지역 사회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지역의 근대화 및 민족 운동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사회에 대한 책임을 실천하였다. 그리고 장로교를 비롯한 안식교·성결교·침례교·순복음교·여호와의 증인 등의 전파는 해방 이후이고, 통일교의 창립과 선교는 1954년 이후이다.

한편 일제강점기에는 교회가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이후 한국인들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하면서 민족 교육 및 민족 독립 운동을 억압하였다. 이에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벌인 교인들을 투옥하고 외국 선교사들을 강제 추방하였다. 종교운동 등 민족 말살 정책을 강화한 것이다.

그러다가 광복이 되자 교회를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던 교회 지도자가 풀려났고 추방당했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돌아왔으며, 특히 북한에서 수 십 만의 기독교인들이 대거 월남하여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으로 수많은 교인이 학살되고 교회도 대부분 소실 파괴되었다. 1953년 휴전 이후 교회는 다시 일어섰고 비약적으로 부흥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현황]

2005년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종교 인구는 2,497만 명에 이르고, 이 가운데 천주교 신자가 514만 6147명이며 개신교 신자는 861만 6438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진천 지역의 경우 성공회와 감리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교회는 1945년 광복 이후부터 전파되었다. 1950년대 6·25전쟁을 거치면서 장로교회 여러 교파가 전파되었고 침례교·안식교·성결교·순복음교 등 다양한 개신교의 교회가 활발하게 전도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진천군은 중부고속도로의 건설과 대규모 산업공단의 조성 등으로 많은 인구가 유입되면서 교회와 신도의 숫자도 증가하였다. 현재 진천군에는 10개 개신교 교파와 15개 분파, 그리고 총 99개의 교회가 있으며 그 숫자는 앞으로도 점진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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