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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809
한자 申英熙
이칭/별칭 신영희(申瑛熙),고송(孤松),치옥(致玉)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지도보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제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성별
생년 1882년(고종 19)연표보기
몰년 1932년연표보기
본관 평산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신영희(申英熙)는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치옥(致玉), 호는 고송(孤松)으로 ‘신영희(申瑛熙)’라고도 쓴다. 1882년(고종 19) 지금의 진천군 이월면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면서 진천군에서도 3월 15일과 4월 2일~3일에 독립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신영희는 여기에 적극 참여하였다.

[활동사항]

1919년 4월 2일 저녁 신영희백곡면 대문리에서 이장 최태성(崔泰成)을 비롯하여 장진호(張晉鎬) 등과 함께 주동이 되어 횃불을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갈월리 상양백리·하양백리·용진을 지나 석현리에 내려오니 참가한 군중이 350여 명에 달하였다. 시위 군중은 석현리에서 밤을 새우고 3일 아침에 석현리 이장 김봉경이 마련한 조반을 마치고, 신영희의 지휘 아래 진천 읍내 쪽으로 시위 행진하였다. 시위 군중은 도망가던 면장 남계석을 붙잡아 태극기를 들려 앞장세우고, 백곡면 주재 일제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였으며, 소장이 시위를 만류하는 것을 뿌리치고 계속 행진하여 사송리까지 왔다.

이 급보를 듣고 진천 주둔 헌병 8명이 달려와 사송리 모퉁이에서 시위 행진을 저지하기 위해 총포로 위협하였다. 이에 신영희가 달려나가 저지하는 헌병 1명과 격투가 벌어졌고, 다른 헌병들이 총대로 신영희의 팔을 후려쳐서 쓰러지게 하고는 시위 대열에 공포를 연발 쏘면서 행진을 저지하자 군중은 어쩔 수 없이 해산하였다. 함께 시위했던 정흥모·서상숙·전성호 등은 체포되어 3주간 구류와 모진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으나, 신영희는 1년 6개월 만에 풀려 나왔다. 신영희는 심한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으로 50세를 일기로 1932년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1987년 8월에 진천군 유림들이 백곡면 석현리 복지회관 앞에 그의 공적을 기리는 사적비를 세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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