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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807
한자 朴基成
영어음역 Park Kisung
이칭/별칭 구양군(歐陽軍),이우현(李宇鉉),이수현(李壽鉉)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제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성별
생년 1907년 6월 1일연표보기
몰년 1991년연표보기
대표경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간부|한국광복군 제5지대 간부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일본 유학 시절 항일운동을 하고, 1931년 상해로 망명하여 무정부주의 운동을 하였다.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광복군이 되어 해방될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활동사항]

박기성(朴基成)[1907~1991]은 1924년 일본 동경에서 개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정찬진(丁贊鎭)·홍영유(洪永裕) 등과 함께 자유청년연맹(自由靑年聯盟)을 조직하여 한인 유학생들과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1년에는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무정부주의자(無政府主義者) 유자명(柳子明)·백정기(白貞基)·엄순봉(嚴舜奉) 등 10여 명과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조선혁명자연맹(朝鮮革命者聯盟)[1937]을 조직하고 일제 밀정 제거에 주력했다. 한편 일본공사 아리요시[有吉]를 처단하고자 했으나 백정기·이강훈(李康勳) 등이 검거됨으로써 실패했다. 또한 기관지 『남화통신(南華通信)』을 발간하여 항일독립운동에 주력하였다.

1937년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고 이듬해 중국육군통신대에서 대위로 근무하였다. 1939년 중경(重慶)에서 나월환(羅月煥)·이하유(李何有)·김동수(金東洙)·이해평(李海平) 등 10여 명과 같이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창립하여 간부로서 활약하였다. 중국 서안(西安)에 본부를 두고 초모 공작활동과 적진에 지하 공작원을 밀파하여 적의 군사기밀을 정탐하였다. 또 한국청년훈련원을 설치하여 본부에 집결한 100여 명의 청년을 교육시켜 독립군 간부로 양성하였다.

1941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총사령부가 중경에서 창립되자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해체되고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었는데, 이때 나월환이 5지대장이 되었고 박기성은 1942년 1월 1일 이하유·김동수·이해평 등과 같이 간부로 임명되었다. 지대 분대장으로서 서안의 총사령부를 호위했으며, 한국청년훈련반(韓國靑年訓練班) 제2구대장으로 새로 모집한 사병을 훈련시키는 등 하북(河北)·북만주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43년 광복군 총사령부로 전임되어 최용덕(崔容德) 총무처장 밑에서 중령으로 과장에 임명되었고, 그 후 김홍일(金弘壹) 참모장 밑에서 대령으로 징모과장의 임무를 맡아 8·15광복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귀국 후에는 1946년 국군에 입대하고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1959년 육군준장으로 예편하였다.

[저술 및 작품]

박기성이 남긴 자서전으로 1984년 도서출판 시온에서 출판한 『나의 조국-회고록』이 있다.

[상훈과 추모]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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