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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349
한자 現代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집필자 정제우

[정의]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충청북도 진천 지역의 역사.

[해방 이후(1945~1950)]

1945년 8월 15일 우리민족은 일제의 무조건 항복과 패망으로 35년간의 일제 사슬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런데 해방 후 국제정세는 우리민족의 자유로운 국가건설을 어렵게 만들어갔다. 일본을 패망시키는 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의 남북을 분할 점령하고, 미국식 자본주의 국가와 소련식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려고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고, 이 해 12월 12일 유엔은 대한민국을 한반도에서 선거가 이루어진 지역의 유일한 정부로 승인하고, 자유진영 50여 개국의 승인을 받았다. 이로써 한국은 자유진영 국가의 일원이 되었다. 이 해 5월 10일 남한에서 단독선거가 실시되고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북한은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하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이리하여 해방 후 3년간의 민족통일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분단국가의 비극적인 역사가 시작되었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찾아온 해방은 진천군민에게도 환희와 감격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쌓이고 쌓였던 일제의 만행에 대한 분노와 반일감정이 일시에 터지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14일 밤 진천군민들은 군 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다수의 무기를 탈취하였고, 자체적으로 군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치위원회를 구성하는 한편, 악질 친일파를 응징하기도 하였다. 당시 군수 이병석(李炳奭)이 자치위원장이 되었고, 군정실시 후에는 남상익(南相翊)이 군수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은 해방 직후의 좌우 대립은 대결국면으로 들어갔다. 좌익은 공산주의 혁명만이 통일을 이루고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여겼다. 이에 따라 정치·경제·사회 각 부분에서 혼란을 조성해 남한을 공산화하려고 시도하였다. 정부수립 이전까지 진천 지역도 좌우 계열 정치단체 간의 대립과 충돌로 혼돈의 연속이었다. 진천의 대표적인 우익단체로 독립촉성국민회와 민족청년단이 통합한 대동청년단이 있고, 좌익계 단체로는 건국준비위원회 계열과 조선공산당이 있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 결정을 내리자 대부분의 국민이 결사적으로 반탁운동을 벌이면서 좌우익 대립은 극단화되어갔다. 1946년 9월 27일 이월초등학교에서 좌익 계열의 홍가록과 박용출 등이 중심이 되어 신탁통치 지지대회를 개최, 시위함으로써 출동한 경찰과 시위대 간에 충돌이 있었다. 1947년 8월 15일경에는 진천읍이월면의 우익 국민회지부와 청년단지부 사무실이 좌익에 의해서 피습당하였다.

이에 우익청년단 간부들[노달선·김성출·이원구·정지영·차문환]이 회동하여 좌익을 공격하기 위해 충주 청년단체[대표 김기철]에 지원을 요청, 8월 28일 김기철은 청년단 210여 명을 동원하여 이월면으로 쳐들어갔다. 그는 사곡리 거먹바위 앞 고개에서 매복 중이던 좌익에 의해 기습을 당해 황급히 음성으로 병력을 철수했다. 이곳에서 충주의 박명섭(朴明燮)김장렬(金章烈)이 전사하였다. 진천청년단은 청주반공청년단에 지원을 요청했다.

피습으로부터 반격·충돌·파괴·소탕·수습까지 약 일주일간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이 폭동으로 우익 116명이 부상당했고, 좌익 500여명이 부상 및 검거되었으며, 가옥 160여 동이 파괴되었다. 이 혼란은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전사한 두 청년의 순국기념비가 진천읍 사구 삼거리에 세워졌다. 한편 정부는 국가보안법 공포로 치안을 안정시키면서 좌익 인사들에게 일정 기간 자수할 기회를 주었는데, 이때 진천군에서는 1,627명이 자수했고 자수자들을 중심으로 보도연맹이 결성되었다. 이로써 진천은 잠시 행정과 치안의 정상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는 1948년의 제주 4·3사건 이후 10월 국군 14연대의 여수·순천 반란까지 일어나고, 지리산·오대산·태백산 일대는 1950년 봄까지 좌익의 게릴라 활동으로 거의 내전 상태에 빠졌다. 이렇게 전국이 뒤끓는 상황 속에서도 진천은 대체로 평온한 모습을 보였다. 1948년 열악한 선거환경에서도 정부수립을 위한 5·10총선거는 국민들의 독립을 위한 결연한 의지로 성공적으로 실시되었다. 진천군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미국에서 돌아온 한민당의 송필만(宋必滿) 박사가 차점자인 독립운동가 박찬희(朴瓚熙)를 누르고 17,676표[득표 비율 68.4]로 당선되었다.

한국 정부의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과제는 무엇보다도 일제 식민지 잔재의 청산을 통해 끊어진 민족사의 맥을 잇고, 토지개혁을 통해 민생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1949년 6월 농지개혁법을 제정, 1950년 3월에 공포하였다. 남한의 농지개혁은 북한에 비해 온건한 것으로 소작인의 입장에서는 미흡한 것이었지만, 대신 지주들의 피해를 줄여 북한과 같은 부작용은 없었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농지개혁이 이루어진 것은 남한의 공산화를 막는 데 일조하였다.

[한국전쟁 전후]

좌익과 좌우 합작파의 반발 속에서 출범한 이승만 정부는 반정부 세력의 공격과 경제난까지 겹쳐 국민의 신임을 얻지 못하였고 혼란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미군은 1949년 6월 군사고문단만 남겨 놓고 철수하였고, 중국에는 1949년 10월 공산당 마오쩌둥[毛澤東]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바로 이즈음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1951년 1월 태평양 지역의 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다고 선언하였다. 모든 사태가 한국에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한편 남한의 어려운 사정과는 반대로 북한은 국력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이 김일성 정권을 강력하게 지원하였다. 북한은 이미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될 때부터 남한을 적화시키겠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남한에서 빨치산 투쟁이 격렬해지자 훈련된 게릴라를 직접 파견하여 지도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북한군 의 병력과 무기도 소련과 중국의 지원으로 보병 10개 단 13만 명과 1개 전차사단, 1개 비행단을 보유했다. 그리고 10만 명의 예비 병력까지 후방에 편성하고 중국으로부터 중공군에 참여했던 조선의용군 5만 명을 편입시켜 병력을 강화함으로써 병력면에서 남한을 월등하게 앞질렀다. 국군은 8개 사단 규모일 뿐만 아니라 전차도 없는 빈약한 상태였다.

전쟁준비를 완료한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아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을 기하여 갑자기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했다. 화력이 월등한 북한군 은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7월 6일에는 진천 지역으로 남하했다. 한국과 이미 상호방위원조협정을 맺고 있던 미국은 6월 26일 즉각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맥아더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을 조직하여 파견하였다.

후퇴하던 국군은 수원 전선에서 재집결하였으나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에게 무너지고, 일차 파병된 미군 제24사단 34연대 병력은 오산 죽미령과 평택에서 연이어 격파되었다. 진천은 6·25전쟁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남하하는 길목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연합군 참전이 결정되자 국군은 시간 여유를 얻기 위해 지연전을 계획했으며 그 주 방어선이 진천 지역이 되었다.

1. 전투 전의 개황

북한군 제2사단은 춘천을 점거한 다음 서울 동쪽으로 남진하려다가 제6사단의 타격을 받은 데에 이어, 이천에서 아군과의 충돌 및 미공군의 공습으로 손실을 입으면서도 게걸음을 하여 진천으로 밀어닥쳤다. 그들은 아군을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에서 포착하려고 제2사단을 중앙으로하여 진천-청주를 직접 공격함으로써 아군 전선을 양단한 다음 대전을 침공하려 했다.

7월 6일에는 제6사단 제19연대를 추격하면서 이월면 중산리 부근까지 나타났다. 아군 수도사단은 신설된 제1군단에 편입되면서 예하에는 제1·제8·제18연대가 예속되었으나 병력과 장비가 용병상 온전히 못하였다. 드디어 7월 6일에는 후퇴하던 국군과 뒤이어 북한군 의 행렬이 광혜원을 거처 진천읍내 방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적 제2사단 주력부대인 2개 연대 규모의 병력과 전차 등 장비가 광혜원에 집결하였다.

2. 진천 지구 전투

진천 지역에서는 크게 세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중산리 전투와 봉화산 전투, 문화안 전투가 그것이다. 중산리 전투는 1950년 7월 6일 오전시작되었다. 수도사단 제1연대 제1대대의 선봉 제1중대[중대장 윤흥정 중위]가 이월면 중산리에 이르러 철수하던 제6사단 제19연대 후위중대와 합세한 다음, 진천-청주 도로를 중심으로 진지를 마련하였다. 이 무렵부터 북한군 은 포격하기 시작하면서 1개 소대 규모의 수색대가 아군 진지까지 침투해왔다. 이들은 아군 양 중대의 잠복조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 날 오후 2시 송림리에 적군 제2사단 예하 제6연대가 전차를 앞세우고 내려오면서 아군 진지를 포격해왔다. 그러나 중산리에 와서는 행군대열로 바꾸고 전차도 동반하지 않은 채 남하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중대장 윤흥정 중위는 그 선두가 가까운 거리에 이르렀을 때 맹렬히 사격하여 적을 중산리 북쪽으로 궤주시켰다.

7월 8일 오전 8시 적은 보병을 동반한 전차 수 대로 급진 남파하여 아군 양 중대의 거점을 점령하였다. 아군은 진천으로 빠져나가 제1연대 주력으로 수용되었고, 이어 백곡천 남쪽 제방을 의지하여 진지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4시 50분에 적군 제2사단의 전차를 동반한 압도적 공격을 받았다. 악전고투 끝에 방어선이 무너지고 잣고개로 철수하여 사단 주력에 합세하였다.

한편 독립기갑연대 장갑 제1중대장 박용실(朴容實) 대위는 수색용 장갑차 3대를 이끌고 철갑탄과 산탄으로 번갈아 집중타를 가하면서 돌진하여 전차 1대를 명중시켰다. 이에 당혹한 적군은 전차 2대로 몇 발 사격하고는 도주하였다. 사단장은 제18연대를 문안산에, 제8연대를 봉화산에, 그리고 선착한 독립연대와 제1연대는 중앙의 잣고개에 투입하여 문안산·잣고개·봉화산 고지에 저항선을 형성하였다. 한편 제17연대[연대장 김희준 중령]는 상계리에 사단 예비로 배치하였다.

7월 9일 수도사단이 부대 정비와 진지 편성을 마치기도 전에 적군은 새벽부터 쏟아지는 폭우와 함께 보병 전차대포의 일제 공격으로 저항선인 문안산·봉화산·잣고개로 개미떼같이 밀려들었다. 병력과 장비 면에서 월등히 우세한 적을 맞이하여 저항선은 순식간에 붕괴되었고, 정오에 적은 진천을 중심으로 남쪽 2,5㎞에 이르는 문안산·잣고개·봉화산을 낀 반월형 거점을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주저항선이 무너지자 사단장은 이날 오후 1시 30분을 기하여 공격을 개시하여 덕원리·봉화산·문안산을 탈취한 후 진천을 공격한다는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오후 1시 30분을 기해 제1연대[연대장 이희권 중령] 제1대대[대대장 장태환 소령]는 제2중대[중대장 박규화 중위]를 왼쪽, 제3중대[중대장 윤흥정 중위]를 오른쪽으로 한 결사대를 과감히 돌격시켜 정상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30분 후에 적의 역습으로 힘겹게 점령한 봉화산을 빼앗겼다. 한편 제1연대와 병행 공격하던 기갑연대도 적의 공격을 격퇴하고 잣고개를 점령하였으나, 적의 역습을 받고 철수하고 말았다. 이에 사단장은 제18연대에게 봉화산을 2차 공격하게 하여 필사의 돌진으로 봉화산 고지를 다시 탈취하였다. 그러나 피 흘려 고수한 보람도 없이 오후 6시 연대의 철수 명령에 따라 봉화산은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

오후 1시 30분부터 돌패기[석박]-상계리 간의 공격 개시선으로 나오기로 한 제8연대[연대장 이현진 중령]는 우측에서 문안산을, 제17연대[연대장 김희준 중령]는 좌측에서 문안산 서쪽 기슭을 우회하여 적을 공격하여 문안산을 점령하였다. 제17연대 제1대대[대대장 이관수 소령]는, 우일선으로 제1중대[중대장 김필상 중위]를, 좌일선으로 제3중대[중대장 장익재 중위]를, 제2중대[중대장 한혁 중위]를 예비로 하여 문안산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포탄이 작렬하는 탄막을 뚫고 오후 5시경에 정상의 좌측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7월 10일 새벽 1시에 시작된 적의 야간기습으로 말미암아 순식간에 문안산의 방수진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각개로 분산된 제17연대는 문안산 남쪽 기슭에서 병력을 수습하여 야습을 강행하여 분전난격 끝에 문안산을 다시 점령하였다. 한동안 소강상태로 있다가 오후 4시에 이르자 적군은 1개 대대 규모로 제2중대 가까이까지 접근, 드디어 고지 정상에서는 순식간에 혼전상태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악전고투를 하였다. 양측 모두 진퇴를 거듭하다가 백경섭(白景燮) 소위가 지휘하는 30명의 특공대가 고지 일부를 장악한 뒤 백병전 끝에 정상을 차지하였다.

적군은 1개 연대 규모가 궤멸되었을 뿐 아니라, 아군이 봉화산·문안산·태령산을 장악하기에 이르자 산발적인 탐색전과 포격으로 아군의 진천읍 진출을 저지하려고 하였으며, 한편으로 양천산 동측으로 우회 침공을 기도하였다. 한편 사단은 봉화산·문안산·태령산을 수중에 넣기는 하였으나, 진천으로 약진할 여력이 없었다. 이 무렵부터 미군 관할 경부국도 방면의 전의가 위협받게 되어 군단의 동과 서측의 전선이 남하하고, 사단도 후방 동서 양측으로부터 협격될 우려가 짙어 전선의 균형을 위해 청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따라 오후 4시 사단은 예하부대에 배속된 제17연대와 제20연대의 엄호 아래 청주 미호천 앞으로 철수하였다. 사단이 철수를 서두르고 있을 무렵 적군 제2사단은 작전을 전환하여 우회 기동으로 수도사단의 배후 차단을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일부 병력으로 문안산을 양공하면서 주공 부대로 진천 남동의 신정리장월리에 배치된 제20연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유엔공군 B29와 B26 폭격기 편대가 출동하여 진천읍-신정리-범바위 일대의 적군 병력과 장비를 목표로 1시간 이상 맹폭하였고, 이어서 F51 전투기가 기총사격과 네이팜탄을 투하하였다. 이와 같이 수도사단은 유엔 공군의 엄호를 받아 진천 지역에서 철수하였다. 적군이 병력을 수습하고 양천산 일대로 공격을 재개하였을 때는 사단 엄호를 맡았던 제17연대와 제20연대도 천신만고 끝에 철수한 후였다. 이로써 6·25전쟁 진천 전투는 막을 내렸다. 진천 지역은 이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전투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3. 전쟁의 결과

6·25전쟁 중 진천 전투에서의 승리는 적의 대전 침공기도를 분쇄하는 동시에 아군의 전선정제(戰線整齊)를 위한 시간의 여유를 얻는 데 기여하였다. 1976년 8월 진천군민들은 이 전투에서 산화한 무명용사들의 충혼을 위로하고 그 공을 빛내기 위하여 잣고개에 참전용사의 위령비를 세웠다.

전쟁 중 진천사람들이 피난을 떠난 수는 많지 않았으며 대부분은 농촌마을에서 전쟁을 겪었다. 남침한 적은 아군의 공습으로 보급이 단절되다시피 하여 현지 약탈로 연명할 정도였다. 그들은 진천 각 마을에 진입 주둔하면서 식사제공을 강박하였다. 북한은 남한 점령지에 인민내무소[파출소]와 인민위원회를 설치하여 만17세 이상 45세까지 의용군을 차출하여 수천 명이 노역과 전선에 강제 동원되었고, 이에 불응하거나 한국정부 관련 인사는 반동분자로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공개 처형당하였다.

더욱이 과거 지주의 토지를 무상몰수·무상분배 한다고 하며 추수를 앞두고 벼와 콩 등 곡식의 낟알을 세기도 하였다. 다행히 9·28수복으로 현물세는 내지 않아도 되었다. 백곡면 어느 마을에서는 청년 25명이 끌려가다가 17명은 도망하였으나 8명은 그 후 소식이 없다고 하며, 일부 인사는 깊은 산속에 은신해 있으면서 가족들로부터 몰래 음식을 보급받기도 하였다.

3년에 걸쳐 전쟁을 벌였던 까닭에 전통 사회생활의 기본 틀이 무너졌고, 읍내의 중요 건물과 민가가 불에 타 폐허가 되었다. 진천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역사회에서 겪은 6·25전쟁은 몇 백 년 내려온 전통사회 구조 자체를 변모시켰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크게 바뀐 것이 상하관계의 신분의식이 깨진 것이다. 또한 엄청난 구미문화가 국내에 쏟아져 들어와 기존문화와 관습을 변화시켰다. 전쟁 복구사업과 경제발전에 따라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인구가 도시로 떠났고, 진천 사회도 이로 인해 격변이 있었다.

[4·19혁명]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는 실정을 거듭하면서 민심에서 멀어져갔다.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제4대 정·부통령 선거는 이승만 정권의 종말을 가져오게 한 최악의 부정선거였다.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국민시위가 대구·부산·서울·마산 등 전국 대도시에서 벌어지는 가운데, 4월 19일에는 서울에서 학생과 시민이 대규모 시위를 하였다. 그 중 일부는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를 향하여 돌진하다가 경찰의 총격으로 1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유혈사태로 12년간에 걸친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허정(許政) 과도정부가 수립되었다.

과도정부는 1960년 7월 29일 내각제와 양원제의 새 헌법에 의거하여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1955년 창당된 민주당이 민의원과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하여, 대통령에 민주당 구파의 윤보선(尹普善)이 선임되었고, 국무총리에 민주당 신파의 장면(張勉)이 임명되었다. 실권은 장면 총리가 장악하였다. 진천에서는 초대 참의원에 송필만(宋弼萬)박찬희(朴瓚熙), 제5대 민의원에 여당이 된 이충환(李忠煥) 후보가 17,738표[53.6%]를 얻어 자유당 소속 제 4대 국회의원이었던 무소속의 정운갑(鄭雲甲)[46.4%]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1960년 8월 23일 출범한 장면 정부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정치 운영을 수행하여 언론이 활성화되고 자유가 넘쳤다. 정부의 모든 규제가 풀리면서 통일 논의와 진보적 정치활동이 재개되었다. 중립화통일론·남북협상론·남북교류론이 있는가 하면 구체적으로 남북학생회담도 시도되었다. 한편으로는 경기침체로 산업이 피폐되고 식량난에 허덕였다. 민주당 정부는 강력한 개혁의지를 보여주지 못하고, 오히려 정파싸움에 휘말렸다. 1960년의 혼란기를 거쳐 1961년 이후에는 정부와 민주당의 지도력이 차츰 강화되면서 사회가 안정을 찾아갔다.

[5·16군사쿠데타와 제3공화국]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강력한 조직체로 성장한 군대는, 4·19혁명 이후에 학생과 진보정치인들의 급진적 통일운동을 위험시하고 정부의 미온적 태도에 불만을 품었다. 관망하던 군은 1961년 5월 초 학생들의 남북회담이 확정되고 북한이 대대적인 지지를 보내오는 등 시위가 극에 달하자 마침내 쿠데타에 의해 권력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朴正熙) 소장 등은 민생의 안정과 반공법 강화, 민족정기 정립에 최대 역점을 두는 등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강권적인 조치를 신속하게 진행시켰다. 그리고 1962년 12월 대통령중심제와 국회단원제의 새 헌법을 제정하였다. 1963년 10월 15일 새 헌법에 따라 직접선거로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를 15만 표 차로 근소하게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어 진천에서 치러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민정당의 이충환 후보가 9,580표[23.7%]로 차점자 국민의당 정운갑 후보[9,247표, 22.9%]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여당인 오원선 후보는 5,243표였다. 공화당의 압승으로 군부에 기반을 둔 제3공화국이 탄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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