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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341
한자 義兵運動
영어의미역 Righfeous Army Movement in Jinche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제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항일 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896년 3월 10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08년연표보기

[정의]

개항기 충청북도 진천에서 전개된 항일 국권회복운동.

[역사적 배경]

의병항일전은 외세 침략에 대한 민족으로서의 항쟁이며 생존권을 위한 저항으로 그 원류는 인간 본연적인 데 있으며, 한국사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것이다. 고려·조선 때 대거란전이나 대몽항쟁 그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의병 등의 오랜 전통이 개항기에 들어와서 부활한 것이다.

또한 구한말 의병항일전의 사상적 맥락의 하나는 민족적 위기의식 속에서 배태된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이다. 이 사상은 성리학을 보위하는 위정(衛正)에 목표를 두고 외래 사상과 문화를 사악한 것으로 단정하여 배척하는 척사(斥邪) 운동인데 열국의 침략이 일제의 침략으로 바뀌어감에 따라 반일운동 또는 의병항일전으로 나타났다.

구체적으로 주전척화론(主戰斥和論)·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양물금단론(洋物禁斷論)을 주장하던 이항로(李恒老)[1792~1868]를 필두로 그 문하의 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최익현(崔益鉉)·유인석(柳麟錫) 등 유림들이 강화도조약으로부터 갑신정변·갑오경장·을미개혁 그리고 을미사변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사건에서 인륜사상과 근왕정신(勤王精神) 그리고 척왜양의 감정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극단적인 저항의식을 고조시켰던 것이다.

한편 유림의 의병항일전이 심화됨에 따라 척사사상의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민중과 합세하여 의병항일전을 발전시켜 나갔다.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은 그 원류가 동학운동과 민란에 있으며 이 두 줄기의 운동이 합류 발전한 것이다. 즉 동학의 ‘척왜양’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경제 파탄에 직면해 있던 농민의 주장과 일치한 점이다.

동학농민전쟁은 처음에는 반봉권 농민운동이었으나 후에는 반침략 항일전으로 나타나 여기에 동학농민전쟁이 독립운동, 즉 국권회복운동으로서의 성격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학농민전쟁에 가담했던 수십만의 농민은 처절한 희생과 불안 속에서 그 탈출구를 모색하게 되었으니 이 점이 비록 사상적 기반이나 사회적 이해를 달리하는 유림의 의병항일전일지라도 의병항일전에 참여할 수 있는 배경의 하나가 된 것이다.

[경과]

1. 전기 의병[1894.6~1896.6]

1894년 6월 일본 최초의 군사적 침략인 갑오변란과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은 전기 의병을 봉기케 한 사건이다. 갑오변란은 한국인의 반일 감정을 고조시켜 한말 최초의 의병항일전의 발단이 되었다. 척사 유생을 비롯한 농민들이 민족 존망의 위기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더욱이 청일전쟁 중 일본의 사주를 받은 친일 개화정권의 갑오경장 등의 정책을 일본 예속적 정책으로 인식한 의병들은 무력으로 일제를 구축하고자 봉기하였다. 그리하여 8월에 구한말 최초로 공주 유생 서상철이 안동을 시작으로 9월에는 평안도 상원에서 김원교가 봉기하였다.

1895년 8월 을미사변으로 일제의 천인공노할 만행이 자행되고 더욱이 1895년 12월 30일 단발령 공포 등 을미개혁은 전국 유생과 농민들의 봉기를 촉발시켰다. 그리하여 1896년 봄부터 전국적으로 항일의병전이 전개되었다. 진천 지역은 새로 구획된 23부제 가운데 의병 활동이 가장 왕성한 충주부와 홍주부에 가까운 지역으로 그 영향을 받은 바 적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1893년경 충청북도 보은 출신 유생 양제안(梁濟安)·양휘안 부자는 척왜양의 인식을 갖고 일본군을 구축하기 위하여 허운초·조백희·이상설(李相卨)[진천인] 등 동지 88명과 진천에서 준비를 갖추고 군사를 조련하고 있다가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진천본영이 해산됨에 따라 김산으로 피신하였다.

그후 1896년 3월 10일[음력] 의병대장 이기찬(李起燦), 참모장 허위(許蔿), 중군 양제안, 군관 이기하[목천인], 찬획 이상설, 조동석 등으로 의진을 갖춘 김산·상주·선산·성주·충청도 유생들의 김산연합의진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수백 명의 김산연합의진은 3월 14일과 4월 4일 두 차례 관군의 기습을 받아 궤멸하고 말았다. 이후 허위양제안 등은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북상하여 진천으로 이동하였으며, 이기찬 등은 음성의 유인석 호좌의진에 합세하였다.

진천에 유진(留陣)한 허위·양제안의 김산의진은 전운경이 광무황제의 해산 전지를 가지고 와 의병 해산을 종용하기에 이르자 허위는 눈물을 머금고 부대를 해산하였다. 국내 정세도 친일내각의 실각과 단발령의 철회 등 의병 항거의 구호 일부가 실현되어 의병항일전의 객관적 여건이 제거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896년 2월 8일 유인석을 대장으로 제천[호좌]의병부대가 창설되어 2월 16일 제천과 충주성을 점령하고 관찰사 김규식을 처단·응징하였다. 이때 별동대를 지휘하는 이범직(李範稷) 등은 소모장(召募將)으로서 진천·목천 등 호서 지방으로 파견되어 소모 활동을 하면서 천안까지 진격하여 삭발을 특히 심하게 강요하여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크게 사고 있던 군수 김병숙을 처단·응징하였다.

관군 및 일본군과 수차에 걸친 공방전을 치룬 호좌의병부대는 음성 지역에 유진하였을 때 총령 정인설(鄭寅卨)은 수천 의병들을 진천과 목천 등지에서 모집하였다. 『독립신문』 7월 2일 자에 1896년 6월에 진천과 옥천에서 의병을 총살하였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진천 지역에서 의병활동이 전개된 배경은 진천 지역이 상경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지만 반침략·반개화의 의병 정서에 걸맞은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열악한 조건으로 관군이나 일본군 같은 근대 무기와 장비를 갖춘 정규 군대와 맞서 항쟁한 전기 의병의 항일정신을 특히 높이 사야 할 것이다.

또한 동학농민전쟁 이래 민중의 전항운동이 전기 의병의 저변에 계승되고 있었고 의병 해산 후에는 화적·영학당·남학당·동학당이 곳곳에서 일어나 활빈당으로 개편되고 있었다. 이때의 농민운동[광무농민운동, 1896~1904]이 결국에는 중기 의병으로 전환해 갔던 것이다.

2. 중기 의병[1904~1907. 7]

전기 의병부대의 해산은 비록 정부의 권유에 따라 행해진 것이라 하더라도 굴복하거나 동조한 것이 아니라 재봉기의 기회를 노린 후퇴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일제는 한국에서의 경쟁자인 청을 축출한 뒤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침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더니 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하면서 주차조선군(駐箚朝鮮軍)을 창설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대한제국을 군사적으로 굴복시켜 한일의정서·한일협약 그리고 끝내는 을사늑약으로 식민지화 절차를 밟기 시작하였다.

이후 구국계몽운동이 전개되고 전기 의병 때 잠적했던 유림 의병장들이 재기하였으며, 평민 또는 전직 관리 출신 의병장들이 새로 일어나 의병항일전은 전 민족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활빈당 등의 농민 조직이 의병으로 전환하였고 일본군뿐만 아니라 그들의 앞잡이인 일진회와 친일 관리들을 공격하는 의병항일전으로 전환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 전후의 진천 및 인근 지역 의병 관련 보도 자료는 다음과 같다.

1) 『황성신문』[1905]

① 5월 10일 : 죽산·충주, 50여 의병이 군자금 징수

② 5월 16일 : 진천·천안, 1,000여 의병 봉기

③ 5월 19일 : 진천, 박재민 등 70여 의병이 군수품 징수

④ 5월 27일 : 충청북도, 각 처에 의병 창궐

2) 『대한매일신보』[1905]

① 9월 10일 : 충청도, 의병이라 하며 전곡과 총검 징수

② 10월 27일 : 충청도, 의병이 동학당처럼 주문을 외움

③ 10월 29일 : 청산, 의병 단결

④ 10월 31일 : 청풍, 50여 의병 출몰

⑤ 11월 26일 : 연풍, 200여 의병과 원주 진위대 격전

3) 『구한국관보』[1907]

① 4월 중순경 : 진천 의병의 공격으로 진천관아의 토지·가옥 증명서 멸실

진천의 중기 의병항일전도 전기 의병 때와 같이 진천인 의병장과 진천의진의 조직과 성격 및 구체적인 활약상을 밝혀 주는 자료는 현재까지 없는 상태이다. 의병의 활동 자료가 미흡한 것은 의병들이 기록을 남기려고 하지 않았거나 수많은 평민 의병들이 기록할 능력이 없던 탓으로 격하되는 듯한 우려가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전국적으로 전개된 중기 의병항일전의 양상을 조명하여 보아 진천 지역 중기 의병의 모습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특히 1905년 5월 19일에는 박재만 의병부대가 진천 일대에서 부족한 군수품을 징수하였으며, 1907년 4월 중순에는 한 의병부대가 진천군청을 공격하여 통감부의 군민 수탈의 전거가 되는 토지·가옥 등의 증명서를 멸실시키는 등의 항일의병전을 전개하였다.

중기 의병에서는 전기 의병 때의 척사의식(斥邪意識)이 크게 퇴색했는데 그것은 국가적 안목에 의한 사회·경제적 반제 논리나 구국 논리가 보다 강조되고 관료 출신 인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민중의 민족의식이 성장한 결과라 하겠다. 그리고 전기 때와 달리 고종이 의병 봉기를 기대하였는데 밀사를 통하여 안으로 의병 봉기를 촉구하고 밖으로는 열국의 지원을 기대하였다. 전투 방식도 소부대에 의한 유격전 방식으로 변해 가면서 자연히 읍성이나 산성에서 산악으로 거점을 옮겨갔다.

3. 후기 의병[1907. 8~1908. 11]

을사늑약에 반대했던 고종이, 진천인 이상설 등 헤이그특사 의거 활동을 트집 잡은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고[7월 20일], 일제의 한국 지배를 확고히 보증한다는 정미7조약[7월 24일], 신문지법[7월27일], 보안법[7월 29일] 등 식민지 추진의 악법 등이 잇달아 공포되었으며, 8월 1일에는 한국군의 강제 해산으로 국망을 눈앞에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해산 군인이 의병에 참여함에 따라 의병항일전의 조직 규모나 전력 면에서 전기·중기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제 유림·농민·노동자·소상인과 해산 군인, 심지어는 의병에 반대했던 계몽 운동가들까지 일어나 의병부대에 참여함으로써 의병운동이 전 국민적 국민전쟁으로 전개되었다.

진천 지역의 전기·중기 의병항일전은 비교적 소극적으로 전개되었으나 후기 의병항일전은 다른 어느 지역 못지않게 활발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독립적인 진천의병으로서의 조직 규모나 주요 세력 등에 관련된 자료가 부족하여 진천의병에 대한 전말을 밝히기에는 어려움이 많다고 하겠다. 다만 일본 측 의병 자료와 당시 신문 등의 자료를 근거로 진천의병을 살펴보고 끝으로 그 성격을 개괄하고자 한다.

1) 1907년 8월~12월의 활동

(1) 진천 지역

① 8월 19일 : 의병 활동에 일본인 청주로 피함

② 8월 21일 : 의병[80명] 활동

③ 9월 2일 : 의병, 일본인 상점 소각 응징

④ 9월 3~4일 : 의병[50명], 일제 보병 1개 소대와 격전, 아군 30명 사상

⑤ 9월 24일 : 이병필 부대[300명], 행정리·장관리에서 활동

⑥ 9월 29일 : 의병[30명], 목천과의 경계에서 교전

⑦ 10월 16일 : 의병부대 활동

⑧ 11월 중순 : 의병과 교전 중 일본군이 군청 소각

(2) 광혜원 지역

① 8월 14일 : 다수의 의병 집결

② 8월 20일 : 의병[1,000명] 집결

③ 8월 21일 : 의병[50명] 집결

④ 8월 27일 : 의병[80명], 일본군 태전토벌대와 교전

⑤ 10월 8일 :신창현 등 연합의병부대, 만죽에서 일본군 대토벌대와 접전

⑥ 12월 17일 : 정재형 부대, 격문-화약 10근, 납·무명 5필, 화승 총알 150발, 징발 포고

(3) 덕산 지역

① 8월 하순 : 방인관 부대[150명] 활동

② 12월 4일 : 의병부대[수백 명], 음성과 경계 지역에서 교전

(4) 초평 지역

① 8월 26일 : 배창근 의병, 일본 보병 2명 총살 응징

(5) 이월 지역

① 8월 23일 : 의병[70~80명] 활동

② 10월 8일 : 연합의병부대, 일제 대토벌대와 대접전

③ 11월 초순 : 권부의[약 900명] 활동

(6) 기타

① 8월 25일 : 의병부대, 진천 지역에서 활약

② 9월 12~15일 : 의병부대[200명] 활동

③ 9월 중순 : 의병부대[200명], 천안·안성·성환·진천에서 활약

2) 1908년의 활동

(1) 진천 지역

① 4월 27일 : 의병[15명], 상계리에서 일본 진천 헌병과 교전

② 5월 29일 : 소의병 부대, 소 1두 징발

③ 6월, 7월 중순 : 박관실 의병부대 활약

④ 7월 7일 : 박향래 의병부대 활약

⑤ 7월 : 이선달 의병대, 목천과의 경계 지역에서 활동

⑥ 7월 : 이백성 의병부대 활약

⑦ 7월 : 이연수 의병부대 활약

(2) 광혜원 지역

① 4월 21일 : 의병[21명], 음성 수비대와 교전

② 5월 21일 : 의병[2명], 일본의 수비대와 교전

③ 6월 14일 : 의병, 음성 수비대와 교전

(3) 문백 지역

① 6월 10일 :한봉수·김규환 부대[67명] 옥성리에서 적 1명 총살

② 7월 28일 : 의병[15명], 오근장 사이에서 군자금 징수

③ 8월 20일 :의병[20명], 오근장 사이에서 군자금 징수

(4) 이월 지역

① 9월 21일 : 진천에서 안성으로 옮김

(5) 덕산 지역

① 1월 7일 : 의병[8명], 서상리·용봉리에서 활약

② 9월 1일 : 의병[20명], 음성 경계 지역에서 활동

③ 9월 10일 : 의병[40명], 음성 헌병대 헌병과 교전

(6) 초평 지역

① 1월 12일 :의병[70명], 음성 경계에서 적과 교전[아군 20명 전사]

② 2월 15일 :의병[30명], 수의동에서 적과 3시간 교전

③ 6월 16일 : 의병[9명], 온암리·진담리에서 군자금 징수

(7) 백곡 지역

① 5월 1일 : 의병[8명], 양백리에서 적과 교전[아군 1명 전사]

② 5월 31일 : 의병[3명], 양백리에서 식량 징수

(8) 기타

① 9월 중순 : 김진용 부대, 목천·청원·진천 활약

② 10월 중순 : 한봉수 부대[18명]

③ 11월 중순 : 의병 출몰

3) 1909년의 활동

① 3월 22일 : 의병[17명], 진천 헌병대[헌병 3명, 보조원 4명]와 교전

② 3월 중순 : 한봉수 부대[18명], 진천·청주·목천·보은에서 활동

③ 4월 중순 : 박관실 부대[16명], 진천·청원·청주·전의에서 활동

④ 5월 15일 : 의병[6명], 초평면 금한리에서 부일동민 6명 구타 응징

⑤ 6월 1일 : 의병[5명], 광혜원면 회죽리에서 군자금 징수[저항하는 동민 1명 피살]

⑥ 6월 4일 : 의병[3명], 이월면 행정리 은행정에서 군자금 징수

⑦ 7월 초순 : 의병[11명], 진천·청원·목천 접경 지역에서 활동

⑧ 7월 6~8일 : 진천 헌병분견소·순사주재소·‘토벌대’가 덕산면 산정리~두타산 영수암~초평면 화산리·연담리·진암리 수색

⑨ 8월 21일 : 김규한·석성국 부대[12명] 활동

⑩ 9월 중순 : 한봉수 부대[15명] 활동

⑪ 11월 중순 : 한봉수 부대[15명] 활동

⑫ 12월 5일 : 의병[4명]부대, 이월면 송현리에서 군수품 징수

4) 1910년의 활동

① 1월 중순 : 한봉수 부대[15명] 활동

② 2월 중순 : 의병[3명], 진천 헌병대[헌병 1명, 헌병보조원 4명]와 교전. 의병 2명 피체

③ 6월 중순 : 의병[11명], 진천과 음성에서 활동

[결과]

1907~1910년에 일제에 의해 한국이 강점될 때까지 거의 3년에 걸쳐 전개된 진천 의병항일전을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대소의병부의 충동 등 활약[교전·유진·통과·은거 등]은 87회이고 응징·응거는 50회이며 군수품·군자금의 징수·징발은 21회, 활약한 총 인원은 4,000여 명이며 밝혀진 의병장은 해산 군인 5명을 포함하여 총 18명이다. 의병측 전사 61명, 부상 118명, 체포 7명, 귀순 9명이 있었는데 반해 일본인 사망[5명]과 부일 한국인 사망[3명] 등의 수치는 인용 자료의 한계가 반영된 것이다.

진천 의병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평가되는 것은 1907년 10월 8일 이월면광혜원면에서의 교전이었다. 10월 8일 일제가 8개 종대의 ‘대토벌대’를 동원하여 이월면의 화산당·장양·쌍호, 광혜원과 만죽 등지의 의병부대를 섬멸코자 하였으나 의병들은 일제의 포위망을 분쇄하는 작전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아군은 무려 28명의 희생을 치러야 했다.

[의의와 평가]

진천 의병운동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애국적이며 자생적인 평민 의병운동이다. 진천 지역 출신 의병장이 익숙한 지형을 이용해 의병부대의 거점 확보, 은거, 이동 시 일사불란하게 활약하였으며, 각종 정보 전달과 식량 공급 시 진천군민의 절대적인 협조가 있었다. 둘째, 소규모 부대 단위의 유격전 전투 양상이다. 의병의 활약 범위가 진천 내 평야 지대와 주변의 차령산맥 등 산악 지대를 둘러싼 이웃 군까지 확대되어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셋째,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강적과 치열하게 맞선 장기간의 투쟁이다. 화력과 장비가 부족하고 부대 조직 등이 일본 정예군에 비할 바가 못 되는 열악한 조건 하에서 불굴의 의병정신으로 결사 항전하였다. 넷째, 진천 의병항일전은 진천군민의 의병정신과 민중적 발전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안으로 3·1운동의 바탕 등 한국 민족의 독립 역량을 증대시켰으며 밖으로 독립전쟁의 초석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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