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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007
한자 政治
영어의미역 Politics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승철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지역민을 통해 획득한 권력을 행사하여 지역 발전을 도모하는 총체적 활동.

[개설]

민주주의는 국가의 최고 의사가 국민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을 전제로 하며 국민 중의 능동적 국민이 직접 국가 의사를 결정하거나 국민에 의하여 선출된 국민의 대표를 의미하는 국가 기관으로 하여금 국민을 대신하여 국가 의사를 결정하는 정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진천군에서 정치는 비제도적인 정치 영역과 제도적인 정치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비제도적인 정치 영역은 해방 직후 정부 수립 이전 시기,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직후의 군부 정권 시기, 그리고 유신체제 이후 등장한 권위주의 체제에서의 민주화 운동 시기 등에서 활동한 다양한 정치 조직과 그들의 활동이다.

제도적인 정치 영역은 선거를 매개로 형성된 정치 영역으로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제헌 의회 선거 등 18번의 국회 의원 선거, 1952년 8월 5일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 등 10번의 대통령 선거, 1972년 유신 체제 하의 대통령 간접 선거를 위해 실시된 3회의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의원 선거, 1981년 2월 11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 1952년부터 1960년까지 3회의 지방 선거와 1991년 3월 26일 군 의회 의원 선거 이후 전면화 된 4번의 전국동시지방선거 등을 통해 나타난 진천 지역의 정치인과 정당 활동, 그리고 이 과정에서 드러난 진천군민의 정치의식 등이다.

[비제도적인 정치 영역]

우선 비제도적인 정치 영역인 해방 직후 정부 수립 이전 시기는 정치가 제도화되기 이전 시기이다. 1945년 해방 직후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은 당시 민족적 과제인 자립적인 국가 권력의 수립과 일제 식민지 잔재 청산의 방향과 내용을 둘러싸고 정치 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이 치열했던 격변기였다. 사회주의 국가의 길을 가고자 한 좌파 진영과 자유주의 국가의 길을 가고자 한 우파 진영 그리고 중도 통합의 길을 가고자 한 중도 진영 등 각 진영 간 그리고 진영 내의 갈등과 대립이 점차 표면화되었던 것이다.

남쪽의 미군과 북쪽의 소련군 개입 등으로 세력 간의 역학 관계가 새롭게 변화하면서 대립과 갈등은 더욱 치열해지기도 하였다. 당시 새롭게 출현한 정당이나 정치 조직의 활동은 제도적 영역에서의 활동이라기보다는 국가 권력 수립과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 해결의 방향과 내용을 둘러싼 주도권 문제였다.

특히 미군정의 등장과 함께 형성된 정치 지형에서 협조와 대립 그리고 대결과 투쟁으로 점철된 정치적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는 정부 수립 과정에서의 대결,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귀결되었으며, 이에 따라 결국 정상적인 정치가 형성되지 못하였다.

충청북도 진천에서도 중앙 정치와 마찬가지로 자립적인 국가 권력 수립과 일제 잔재 청산을 둘러싼 정치 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대결 중심의 정치 활동은 한 동안 지속되었다. 건국준비위원회 진천치안유지회와 조선인민공화국 진천군 인민위원회, 각 면 인민위원회, 광복청년대, 대동청년단 진천지회 등 각 진영 간에 정치 세력이 조직되어 활동하는 등 격동기 현대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냉전 체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6·25전쟁 과정에서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진천 지역에서도 정치 세력 간의 대립과 투쟁, 그에 따른 희생이 상당하였다. 이는 정치와 정당 참여를 두려워하거나 등한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결국 해방 직후 정치적 격변기 진천은 다양한 정치 세력의 등장과 활동이 이루어졌으나, 미군정과 6·25전쟁을 계기로 좌파와 진보 진영의 정치 세력은 사실상 궤멸되었으며, 우파 중심의 보수적인 정치 지형으로 재편되었다. 1960년 4·19혁명과 1970~1980년대 민주화 운동 시기 진천에서도 비제도적인 정치 영역의 활동이 제한적인 범위에서 전개되었다.

[제도적인 정치 영역]

1. 제1공화국 시기

제도적인 정치 영역에서 진천의 정치적 상황은 대체로 중앙 정치 집권 세력의 지역 조직이 우세한 정치적 성향을 보여주었다. 우선 정부 수립 및 제1공화국[1948~1960년] 시기 진천 지역 정치 상황의 특징은 진보 진영의 정치 세력이 축소되거나 점차 궤멸되어가는 과정에서 보수 세력 중심의 정치와 자체 내 분화 현상이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제헌 의원 선거에서는 단독 정부 수립 반대를 주장한 좌파와 중도적 성향의 정치 진영의 불참 속에 진행되었다. 당시는 정당 정치가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치 단체와 무소속 후보 중심으로 선거가 치러졌다. 진천에서도 한국민주당의 송필만·박찬희 후보와 무소속의 박노열·김봉식 후보 중심으로 선거가 치러져 한국민주당의 송필만 후보가 당선되었다.

진천의 정치 상황은 그 이후에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제2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무소속의 이충환 후보가 당선되었고, 1954년 5월 20일 치러진 제3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중심으로 창당한 자유당의 이충환 후보가 당선되었다.

1958년 5월 2일 실시된 제4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자유당과 민주당이 맞붙은 선거에서 자유당 정운갑 후보가 당선되었다. 제4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여당인 자유당이 농촌과 소도시에 진출하여 크게 승리를 거둔 반면에 야당인 민주당은 수도권에서 승리를 하였다. 군소 정당 및 무소속의 진출은 현저히 감소하였다.

2. 제2공화국~제3공화국 시기

1960년 4·19혁명 이후인 7월 29일 실시된 제5대 국회 의원[당시 민의원] 선거 당시 진천의 정치 지형에서 민주당과 무소속이 대결한 가운데 민주당의 이충환 후보가 당선되었다. 참의원 선거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도입된 것으로써 선거구를 시도 단위로 하고 의원 정수를 2명 내지 8명으로 하는 대선거구제로 하였다. 그러므로 후보자도 최소한 7명에서 34명까지 이르는 양상을 보였다.

당시 자유당 출신 무소속 후보로 당선된 의원은 전국에 49명이었다. 반면에 진천군에서는 혁신 세력을 대표하는 사회대중당과 한국사회당 후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는 당시 진천 지역의 정치 지형이 보수 세력 중심으로, 그것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 기존 자유당 중심의 정치적 기반이 얼마나 견고하였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진천 지역의 선거 결과는 대개 전국 선거와 유사한 결과를 보여 주었으나 5·16군사정변과 함께 등장한 군정 이후에 실시된 선거 결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1963년 10월 15일 실시된 제5대 대통령 선거와 1967년 5월 3일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진천 지역의 선거 결과는 전국 선거 결과와 다른 현상을 보여 주었다.

즉 전국에서는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앞섰으나 진천군에서는 민정당 윤보선 후보가 5천표 이상을 앞섰다는 점이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인 1963년 11월 26일 실시된 제6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도 집권당인 민주공화당 오원선 후보가 낙선하고, 민정당의 이충환 후보가 당선되었다.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와 그 이후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의 진천 지역 결과는 전국 선거 결과와 같았으며, 국회 의원 선거의 결과도 대개 집권당 후보가 유리한 선거 결과로 귀결되었다.

다만 1987년 이후 형성된 지역주의 정치 구도에서 지역 주의적 요소가 상대적으로 적었으나 기대와는 다른 정치적 결과도 생겨났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직후 실시된 대선 과정에서 지역 정치 구도는 강화되었으며, 충청북도에서도 김종필이 속한 신민주공화당의 지역 정당이 출현하였다.

대선 직후 실시된 제13대 국회 의원 선거는 우리나라 선거 역사상 지역 구도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선거였으며, 진천에서도 이전과 달리 민주정의당의 김완태 후보가 당선되었다. 제14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도 충청권에 기반을 둔 민주자유당의 민태구 후보가 당선되었다. 제17대, 제18대 국회 의원 선거의 경우는 민주당 후보인 김종률 후보가 당선되었으나 2009년 9월 24일 당선 무효형을 받아 2009년 10월 28일 보궐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지역 정치 조직]

진천에서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각 시기별로 주요 정당의 지구당이 활동하였다. 다만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의미 있는 근대적 의미의 지구당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정당법」이 제정되어 시행되기 시작한 1963년 1월 1일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 지역에서 활동한 정당 및 정치 조직들은 합법·반합법·비합법 등 임의적 성격이 강하였으며, 법률적 지원이나 보호를 받지도 못하였다. 또한 선거 당시 후보자의 선거 조직에 불과한 것이었다.

1963년 이후 진천에서 활동한 주요 지구당을 보면, 1963~1971년 소선거구제 하에서는 민정당[이충환]과 민주공화당[오원선→이정석]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73~1987년까지는 중선거구제로 관할 범위가 괴산군, 진천군, 음성군 지역이 해당되었다.

이 당시 활동한 주요 지구당을 보면, 유신 체제에서는 민주공화당과 신민당의 지구당 조직이 주요한 활동을 하였으며, 전두환 정권 당시에는 민주정의당[위원장 안갑준→안갑준→김종호]과 민주공화당[위원장 김완태→오용운], 신민당[위원장 이충환→이충환] 한국국민당[위원장 김완태→김완태] 그 이후에도 중앙 정치 조직의 이합집산만큼이나 진천 지역의 지구당 조직도 이합집산을 하는 등 정당의 유동성이 매우 심하였다.

그동안 생성·소멸한 진천 지역의 지구당을 보면[편의상 진천지구당 또는 진천군 지구당 생략], 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신민주공화당·민주자유당·통합민주당·민주당·통일국민당·신정당·신한국당·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한나라당·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통합민주당 등이다. 이와 같이 「정당법」으로 지구당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한 1963년부터 지구당을 법적으로 폐지한 2004년 3월까지 진천 지역에서도 무수히 많은 지구당 조직이 생성·소멸되었다.

2004년 3월 「정당법」의 개정과 함께 지구당이 폐지됨에 따라 각 정당의 지역 조직은 각 정당의 지방 조직 규정에 따라 당원들의 협의체 성격인 당원 협의회 또는 지역 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 조직이 지구당과 위상이 다른 점은 법률적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안정적이지도 못하고 유동성이 심하다는 점이다. 2008년 7월 현재 진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각 정당의 지역 조직은 한나라당 진천당원협의회, 통합민주당 진천지역위원회, 민주노동당 지역위원회 등이 있다.

[기초 자치 단체장 선거]

1995년 6월 27일 실시된 제1회 기초 자치 단체장 선거에서는 무소속의 김영환 후보가 10,278표[34.3%]를 획득하여 당선되었다. 1998년 6월 4일 실시된 제2회 기초 자치 단체장 선거에서는 자민련의 김경회 후보가 11,162표[40.1%]를 획득하여 당선되었다.

2002년 6월 13일 실시된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한나라당 노태근 후보가 5,488표[20,6%], 민주당의 유영훈 후보가 8,861표[33,3%], 자민련의 김경회 후보가 12,241표[46.0%]를 득표해 김경회 후보가 2선으로 당선되었다. 2006년 5월 31일 실시된 기초 자치 단체장 선거에서는 열린우리당의 유영훈 후보가 13,152표, 한나라당의 김경회 후보가 12,334표, 남명수 후보가 2,102표를 획득하였으며 열린우리당의 유영훈 후보가 당선되었다.

[기초 의원 선거]

기초 의원 선거 역시 모두 5번 치러졌다. 지방 자치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풀뿌리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선거라는 점에서 많은 관심과 기대 속에서 1991년 3월 26일 실시된 제1대 기초 의회 선거는 7개 선거구에서 8명의 군 의원을 선출토록 규정되어 입후보 등록을 마감한 결과 18명이 출마하여 평균 경합 비율이 2.2대 1로 나타났다. 진천읍에서는 이문구·김창수 후보가, 문백면은 이동우 후보가, 백곡면은 차영철 후보가, 덕산면은 조평희 후보가, 초평면은 정용기 후보가, 이월면은 송은섭 후보가, 만승면은 김명제 후보가 각각 당선되었다.

1998년 제3대 기초 의회 선거에서는 진천읍의 경우 김철래 후보가 당선되었으며, 문백면은 이동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백곡면은 이영석 후보가 당선되었으나 사망하여 김종석 후보가 부궐 선거로 당선되었다. 덕산면은 조평희 후보가 당선되었으나 도의원 보궐 선거 출마로 정광섭 후보가 군 의원 보궐 선거로 당선되었다. 초평면은 정용기 후보가, 이월면은 송은섭 후보가, 만승면은 장수동 후보가 각각 당선되었다.

2002년 제4대 기초 의회 선거는 진천읍에서는 남명수 후보가 당선되었으며, 문백면은 유재봉 후보가, 백곡면은 양진한 후보가, 덕산면은 정광섭 후보가, 초평면은 정용기 후보가, 이월면은 오봉석 후보가, 광혜원면은 김덕규 후보가 각각 당선되었다.

2006년 제5대 기초 의원 선거에서는 소선거구제에서 중선거구제로 바뀌었으며, 의원의 유급제화 도입, 의원 정수 축소, 정당 공천제와 비례 대표 제도 도입 등 많은 변화가 있는 가운데 실시되었다. 진천군에서는 2개의 지역구에서 6명의 지역구 의원이 선출되었다.

가 선거구인 진천읍·문백면·백곡면에서는 신창섭 후보가 2,749표, 김동구 후보가 2,482표, 박양규 후보가 2,374표를 획득하여 유재봉, 김용묵, 박종학, 양진한, 유순상, 유재석, 이호주, 황창원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었다. 나 선거구인 덕산면·초평면·이월면·광혜원면에서는 윤근량 후보가 2,028표, 정광섭 후보가 1,841표, 오봉석 후보가 1,622표를 획득하여 이면우, 임충섭, 김덕규, 이강수, 김기형, 박호정, 신동일 장수동, 조승래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비례 대표로는 한나라당의 이완식 후보가 당선되었다.

[참고문헌]
  • 『진천군지』(진천군지편찬위원회, 1994)
  • 진천군청(http://www.jincheo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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