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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C030203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삼덕리 3구 상덕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종호

삼덕리 상덕마을 대동계 날, 우리는 상덕노인회관에서 마을 어른들을 만나 상덕마을의 이모저모에 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마을 어른들은 6·25전쟁 당시 다리를 다쳐 지금까지 불편함을 감수하고 살아가고 있는 최인환 할아버지와 그의 아내 조금년 할머니를 가리키며 삼덕리의 자랑거리라고 말하였다. 둘 다 삼덕리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올해 결혼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하면서, 이렇게 둘이서 해로하며 잘사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느냐고 입을 모아 축하의 인사를 해 주고 있었다.

[자주 보고 싶어 옆 마을로 시집보낸 딸]

최인환 할아버지는 상덕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건실한 청년이었고, 조금년 할머니는 하덕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어여쁜 처자였다. 두 사람이 19세 되던 해, 조금년 처자의 아버지 조경순 씨는 딸의 혼처를 찾던 중 상덕마을의 최인환 청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조금년 처자는 집안의 외동딸로 귀하디귀하게 자란 터라, 아버지가 딸을 멀리 시집보내고 싶지 않아 하셨단다.

특히나 조금년 처자는 젖을 떼기도 전에 어머니가 죽어서 할머니가 손녀를 키우며 젖동냥을 다녔는데, 젖을 주던 젖어미에게 같은 또래의 아이가 있어 늘 뿌연 젖을 먹지 못하고 맑은 젖만을 먹였다고 한다. 그래서 할머니는 늘 젖어미에게 “우리 손녀 뿌연 젖 좀 맛보게 해 주오.”라고 부탁을 했단다.

“그냥 진천장에 가다가 한 번 보고, 장에 갔다 오다가 한 번 또 보고. 내가 외동딸이라 우리 아버지가 날 멀리 시집보내기 아주 싫어하셨어. 그렇게 오다가다 아무 때나 날 보려고 이리로 시집을 보낸 거지 뭐.”

이렇게 아버지가 딸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에 바로 옆 마을로 시집을 오게 되었다는 재미있는 사연이었다.

최인환 총각은 결혼하기 전, 친구 한 사람과 함께 맞선을 보러 조금년 처자의 집에 온 적이 있단다. 화장품과 옥색 고무신을 품에 넣고 왔으나 마루에 우두커니 앉아 서로 부끄러워 얼굴도 마주보지 못한 채 끝이 났다고. 그렇게 아름답게 만난 두 사람은 1939년 9월 19일 조금년 씨의 생일날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날 이틀 전부터 굶었던 신부]

결혼식을 하던 날, 조금년 처자는 결혼식 이틀 전부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굶었다. 화초장을 하고 족두리를 쓰고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가마를 타고 신랑 집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혹시라도 가마를 타고 가다가 용변이 마려울까 봐 먹을 수가 없었는데, 그것도 그것이지만, 첫날밤을 치르고 다음날까지 화장실을 가는 것이 너무 부끄러워 화장실에 갈 일이 없게 하기 위해 일부러 굶었다고 한다. 그만큼 전통 시대의 결혼식에서는 여자의 행실에 제약이 있었고, 보수적인 면모가 확실하게 살아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힘들게 가마를 타고 와 결혼식을 하는 날, 옆에서 결혼식을 도와주는 유모가 국수 딱 세 가닥을 입에 넣어 준 것 빼고는 먹은 것이 없어 배가 무척 고팠다고 한다. 그러나 조금년 씨는 결혼식과 첫날밤이 너무 긴장이 되어 배고픔을 느끼다가도 이내 얼굴이 땀범벅이 되어 배고픔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고 하였다.

그렇게 조금년 할머니가 시집을 온 지 1년 만에 남편 최인환 할아버지는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리고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처음에 할아버지가 다친 모습에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큰 다행이라 여기며 긍정적인 생각으로 재미있게 오순도순 살다가 어느 새 60주년을 맞이한 것이다. 조금년 할머니는 남편이 늘 다정하게 잘해 주어 그렇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꾸밈없는 얼굴에서 늘 행복이 가득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묻어나고 있었다.

[정보제공]

  • •  조금년(여, 1932년생, 삼덕리 3구 상덕마을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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